<소설>해는뜨고 해는지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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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5면

제2부 불타는 땅 새들은 돌아오지 않았다(25)『그렇다고 마냥 이러고 있을 것도 아니잖아.』 『목마른 놈이 샘 판다.급하기로야 왜놈들이지 왜 우리가 촐싹거리냐.』 바람이 불 때마다 불길이 너울거리고,어둠 속으로 연기가 꼬리를 흔들며 올라갔다.
불빛이 어른거리는 얼굴로 말없이 불길을 바라보면서 김씨는 생각했다.어쩌다가 조선은 이 지경이 되었는가.나라를 되찾기는커녕 조선사람 그루터기도 못 알아보 게 되는 건지도 모르지.되어가는꼴이 그렇지 않냐 말이다.조상 봉사하던 제기까지 훑어가는 게 왜놈들인데,어느 세월에 마른 하늘을 보고 살까 모르겠다.생각하면 참… 뒷집 짓고 앞집 뜯어 내라는 꼴이지.옛적부터 섬나라 땅에 글 가르치고 물건 날라다가 쓰는 법 알려주고 그랬다지 않던가.그랬던 것이 이제는 범을 길러서 그 아가리에 먹히고 말았으니,못난 백성,제사 그릇까지 빼앗겨도 싸지 싸.
화톳불가에 둘러앉은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덕호가 방에서 나왔다.그의 옆으로 세 명의 사내가 달라붙었다.두 사람은 손에 밧줄을 들었고 한명은 몽둥이를 등뒤로 감추고 있었다.
사람들의 등뒤로 와 선 덕호가 깊이 숨을 들이마시면서 주위를둘러보았다.밧줄을 든 사내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입술을 깨물었다. 헛기침을 하고 나서 덕호가 느릿느릿한 목소리로 김씨를 불렀다. 『어이,김씨.나 좀 봐.』 김씨가 고개를 돌리더니 사람들의 어깨를 헤치며 걸어나왔다.김씨가 앞에 와 서는 것과 때를 같이 해서 덕호가 옆에 서 있던 사내들에게 눈짓을 했다.순간 불가에 모여앉았던 사람들 몇이 뒤로 빠지고 있었다.그 사람들과자리를 바꾸듯이 덕호 옆에 있던 사내 둘이 안으로 들어섰다.순간,펄쩍 누군가가 뛰어오르는가 하자 뒤에 서 있던 사내가 앞으로 달려들어가며 종길이의 목을 끌어안았다.벼가 쓰러지듯 사람들이 종길이를 향해 우루루 달려드는가 하자 그것도 잠깐,어느 새땅 바닥에 길게 엎어진 종길이를 올라타고 그의 두 손을 등뒤로묶고 있었다.
여기 저기서 고함소리가 터져나왔다.
『조선사람 팔아먹는 그런 새끼는 더 두고 볼 것도 없어.그냥바다에 갖다 처넣어.』 『죽이긴 누구 편하라고 죽여.똥물이 올라오게 혼쭐을 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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