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朴壽根 30주기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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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김장철 소스리 바람에 떠는 나목(裸木).그러나 보채지 않고늠름하게,여러 가지들이 빈틈없이 조화를 이룬 채 서있는 나목,그 옆을 지나는 김장철 여인들.여인들의 눈 앞엔 겨울이 있고,나목에겐 아직 멀지만 봄에의 믿음이 있다.나는 홀연히 그가 바로 저 나목이었음을 안다.불우했던 시절,온 민족이 암담했던 시절,그 시절을 그는 바로 저 김장철의 나목처럼 살았음을 나는 알고 있다』.
전쟁통의 서울,미군 PX 초상화매점에서 「환쟁이」와「경리(經理)」로 함께 일한 박완서(朴婉緖)는 그 암울한 불안과 혼돈의시기를 「미치지도,환장하지도,술취하지도 않고,화필(畵筆)도 놓지 않고,가족 부양도 포기하지 않고 살 수 있나 싶은 사람」으로 비친 박수근(朴壽根)의 삶과 예술을 데뷔작 『나목』을 통해이처럼 그려냈다.
박수근의 그림은 누구보다 「한국적」이다.가난을 운명처럼 받아들이는 서민들의 삶을 그는 극도로 단순화된 선(線),회색(灰色)의 고독감,화강암의 껄끄러운 표면 질감을 연상시키는 마티에르로 화폭에 담아냈다.
『나는 인간의 선함과 진실함을 그려야 한다는,예술에 대한 대단히 평범한 견해를 갖고 있다.따라서 내가 그리는 인간상은 단순하다.나는 가난한 그들의 가정에 있는 평범한 할아버지와 할머니,그리고 어린 아이들의 이미지를 가장 즐겨 그린 다.』이런 소박함으로 그는 주위 서민들의 가난한 일상(日常)에서「건강한 생의 모범」을 포착,암벽(岩壁)처럼 단단한 화면 속에 붙잡아 맸다.생전(生前)에 그 흔한 개인전 한번 갖지 못하고 숙명 같은 가난속에 51세로 마감한 생애지만 그는 따뜻함을 잃지 않았다.부인이 생전에 쓴 회상기에는 「새 달력을 걸 때마다 내 생일에 빨간 연필로 동그라미를 그려 넣어주던 친정어머님 같은 분」으로 그려지고,자녀들에게는 동화책 사주기도 어려웠던 시절 육필(肉筆)로 글을 쓰고 채색그 림을 직접 그려넣어 동화책을 만들어주던 자상한 아버지로 기억된다.하긴 61년 일본국제자유미술전에 출품했던 그의 그림이 도난당했다는 통보가 날아오자『아마 작품은 탐나는데 수중에 돈은 없고 해서 훔쳤을 게야』하며 넘겨버렸다던 그이기도 하다.
예술에 대한 엄격함과 삶을 보는 따뜻한 마음을 잃지 않았던 박수근이 세상을 떠난지도 벌써 30년.그를 그리는 전시회가 지금 갤러리 현대에서 열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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