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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레기 줍는 대통령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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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2. 지미 카터는 대통령 퇴임 직전 한 통의 전보를 받았다. 전보의 발신인은 전미은퇴자협회였고 내용은 이랬다. ‘귀하가 전미은퇴자협회의 정식 회원이 되었음을 알려 드립니다’. 대통령이 되기 전에 땅콩농장 주인이었던 지미 카터는 대통령 직에서 내려오자 더 이상 뭘 할지 막막했다. 그전처럼 땅콩농장 주인으로 돌아가 살기도 쉽지 않았다. 한 달에 한 번꼴로 에모리대학으로 출강은 했다지만 누가 보더라도 그의 삶은 점점 축소되는 것 같았다.  

#3. 노무현 전 대통령이 청와대를 떠나 봉하마을로 내려간 것은 지난달 25일이었다. 그는 재임 중 권위주의를 청산하고 사회적 균형발전에 대한 신념 아래 나름의 노력을 했지만 역대 대통령 가운데 가장 인기없는 대통령이란 낙인을 쓴 채 낙향하고 말았다. 봉하마을로 내려간 다음날 그는 노타이 차림의 콤비 양복에 슬리퍼를 신고 대문 앞에 섰다. 하지만 갈 곳이 없었다. 지미 카터가 그랬던 것처럼 그 역시 딱히 할 일이 없었던 게다.

#4. 며칠 전 노 전 대통령은 봉하마을과 화포천 일대에서 쓰레기를 주웠다. 장화를 신고 장갑을 낀 채 노란 봉투에 집게를 든 그의 모습은 청와대에서의 울울답답했던 모습보다 되레 보기 좋았다. 쓰레기 줍는 대통령! 그래서일까. 정작 퇴임 후 그는 인터넷에서 이명박 대통령마저 제치고 인기 검색어 순위 1위에 오를 만큼 뒤늦게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다. 누군가는 이를 두고 쇼를 한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그는 진심으로 열심히 쓰레기를 주웠다. 쉬운 일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두 주 전까지만 해도 그는 어쨌든 이 나라의 대통령이지 않았던가.

#5. 할 일을 찾지 못한 채 이리저리 소일하던 어느 날 문득 지미 카터는 깨달았다. 삶은 점점 축소되는 것이 아니라 점점 확장되는 것이라고. 그는 이내 망치를 들었다. 집없는 이들을 위해 기꺼이 목수가 되었다. 그것이 해비탯 운동이 됐다. 그는 해외의 민주화 노력을 지원했다. 니카라과의 선거감시인으로 활동하고 분쟁 지역을 제 발로 찾아 나섰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니고 직함이 따로 있을 리도 없었다. 그저 전직 미국 대통령이었을 뿐이다. 처음에는 쓸데없이 일에 개입한다는 비판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실질적으로 일을 풀어냈다.  

#6. 94년 한반도에 북핵 위기의 먹구름이 잔뜩 끼어 전쟁 발발 직전의 상황까지 치달았을 때 지미 카터는 평양을 방문해 김일성 주석을 만났다. 그리고 다시 남으로 내려와 김영삼 대통령을 만나 극적으로 남북 정상회담을 성사시켰다. 비록 김 주석의 갑작스러운 사망으로 남북 정상회담은 불발로 끝났지만 한반도의 북핵 위기는 한고비 넘길 수 있었다. 그런 노력에 대한 국제적 평가를 받아 지미 카터는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그는 재임 중 가장 형편없는 대통령으로 평가받았지만 퇴임 후에는 가장 성공한 대통령이 됐다.

#7. 노 전 대통령이 봉하마을과 화포천에서 쓰레기를 줍는 모습에서 그의 진면목을 본다. 작고 소박하지만 그런 모습을 통해 그가 멋진 퇴임 후 대통령상을 하나하나 만들어 주길 바란다. 그의 정책과 입장을 비판할 순 있겠지만 그는 결코 미워할 수 없는 사람 아닌가.

정진홍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