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이훈범시시각각

"장수는 병사들과 똑같이 느껴야 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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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대통령이 “청와대 왔으니 고생길 텄다. 하지만 우리가 힘들수록 국민은 덜 힘들다”는 말로 회의를 시작했음에도 참모들이 병아리 눈물만 한 희망을 부여잡고 있던 걸 보면 잠없는 대통령을 보좌하는 일이 고되긴 한 모양이다. 59일간 활동한 인수위의 ‘노 홀리데이(No Holiday)’ 추억이 5년 임기 내내 계속될 거라 생각하면 뒷골이 묵직하게 당겨올 터다. 정말 그러려는지, 그들은 일요일에도 수석비서관 회의를 열어야 했다. 대통령 지시였다는 거다.  

“내 명령을 받으면 한밤중이라도 지체없이 말을 달려야 한다”던 칭기즈칸의 ‘빌리크’가 떠올랐을지 모를 일이다. 빌리크는 칭기즈칸의 어록인데 곧 법으로 통했다. 학자들이 정리해 놓은 게 30개 정도 되는데 그러고 보니 대통령이 내린 지침과 비슷한 게 많다.

우선 “비서관들이 대통령 생각을 꿰뚫고 있어야 한다”는 주문이 그렇다. 두바이는 셰이크부터 말단 공무원까지 같은 국정철학을 공유하고 있더라고 예까지 들어가며 강조한 거다. 빌리크에는 이런 말이 있다. “모든 만호장·천호장·백호장들은 연말연초 나한테 와서 훈시를 듣고 가야 지휘하는 데 지장이 없다. 자기 겔(천막)에 들어앉아 내 말을 듣지 않는 자는 물에 빠진 돌처럼, 갈대밭에 떨어진 화살처럼 사라질 것이다.”

“수석들은 앞으로 술마시기 힘들 거다. 어디 가서 친구들과 술 한잔 먹어도 말이 나오니까. 놀기 좋아하는 사람은 고민될 거다”라는 ‘정말 고민될’ 말도 그렇다. 칭기즈칸은 이렇게 말했다. “술을 끊을 수 없다면 한 달에 세 번만 마셔라. 그 이상 마시면 처벌하라. 한 달에 두 번 마신다면 참 좋고 한 번만 마신다면 더 좋다. 안 마신다면 정말 좋겠지만 그런 사람이 어디 있으랴.”

“사냥 나가면 짐승을 많이 잡아야 하고, 전쟁 나가면 사람을 많이 죽여야 한다”는 빌리크 역시 대통령이 평소 강조하는 실용주의 그대로다. 삼일절 날 새벽부터 수석들을 부부동반으로 불러 임명장 주고 조찬을 함께한 것도 부인들에게 “당분간 남편 얼굴 볼 생각 말라”는 부탁을 하고 싶어서였을 터다. “남편은 태양처럼 언제나 같이 있을 수 없다. 아내는 남편이 사냥을 가거나 전쟁에 나가도 집안을 잘 꾸리고 깨끗이 해야 한다”는 빌리크처럼 말이다.  

중앙아시아 초원을 호령한 정복자나 글로벌 코리아를 외치는 대통령이나 워커홀릭 리더들의 생각은 비슷한 모양이다. 칼을 쥐고 뛰건, 서류가방을 들고 뛰건 세계 속에서 국가를 경영하는 건 한 가지란 얘기다. 참모들에겐 안된 말이지만 일 하나는 똑 소리나게 한다는 대통령이 일 더 하겠다고 참모들 닦달하는 모습이 유쾌하다. 장수들을 고르는 데 아쉬움도 있었지만 칭기즈칸의 빌리크대로 “자격이 없는 십호장·백호장·천호장은 갈아치우고” 출발하면 된다. 그래도 남는 작은 허물은 그만큼 더 공을 쌓아 갚게 만들면 된다.

하지만 무리할까 두렵다. 하루빨리 공을 쌓으려 다그치다 일을 그르칠까 근심하는 할머니 마음이다. 칭기즈칸도 말한다. “예순베이는 훌륭한 용사다. 오래 싸워도 지치지 않고 피로한 줄 모른다. 그래서 모든 병사가 자기 같은 줄 알고 성을 낸다. 그런 사람은 지휘자가 될 수 없다. 군대를 통솔하려면 병사들과 똑같이 갈증을 느끼고 똑같이 허기를 느끼며 똑같이 피곤해야 한다.” 참모들도 그렇겠지만 국민도 지치긴 마찬가지다.

이훈범 정치부문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