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자여행>危機一髮-위태로움이 매우 절박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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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5면

당(唐)의 한유(韓愈)가 살았던 때에는 불교가 성행했다.동시대에 해당하는 우리의 삼국시대에 우리나라에서 불교가 성행했던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그러나 공자의 후계자라고 자처했던 한유는 이같은 상황을 도저히 묵과할 수 없었다.
그에게 불교는 「타도」의 대상일 뿐이었다.
하지만 당시 헌종(憲宗)은 열렬한 불교 신봉자였다.한번은 부처님의 사리(舍利)를 궁에 모셔다 놓고 국태민안(國泰民安)을 비는 잔치를 거국적으로 벌이게 되었다.
이 때문에 민폐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그렇지 않아도 불교를 반대했던 한유로서는 죽은 부처의 「뼈」를,그것도 신성불가침의 궁궐에 모셔 놓고 제사를 벌인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는 즉시 상소했다.감히 천자에게 대든 것이다.그것도 부족해불교를 신랄히 비판했다.그의 과격한 언사는 헌종을 격분케 했고,마침내 참형(斬刑)이 내려졌다.그러나 대신들의 도움으로 집행은 면하고 조주(潮州.현 廣東일대)로 귀양가게 되었다.
조주에서 그는 스님과 사귀면서 가깝게 지냈다.이 바람에 한유가 불교신자가 되었다는 소문이 돌았다.그러자 친구이자 시인인 맹교(孟郊)가 편지를 써 사실 여부를 물어왔다.
한유는 깜짝 놀랐다.그는 즉시 회신을 써 자세한 내막을 밝힘과 동시에 이번에도 조정과 불교를 싸잡아 신랄히 비판했다.
『불교 때문에 현재의 나라꼴은 만신창이가 되었으며 사직의 위태로움은 마치 머리털 한가닥에 매달린 천근의 쇳덩이와 같소(一髮千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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