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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임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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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미국의 가장 인상적인 대통령 취임식으로는 제35대 존 F 케네디의 취임식이 꼽힌다. 1961년 1월 20일 영하 7도의 맹추위 속에 수많은 군중은 케네디의 취임 연설문에 도취했다. “어렵고도 쓰디쓴 평화에 의해 단련된 횃불이 이제 새로운 세대의 미국인에게로 넘어왔다.”

그의 우렁찬 취임사는 그 유명한 “국가가 나에게 무엇을 해줄 수 있는지 묻지 말고 내가 국가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 물어라. 그리고 전 세계 국민도 미국이 여러분을 위해 무엇을 해줄 수 있는지 묻지 말고 우리가 인류의 자유를 위해 무슨 일을 할 수 있는지 물어라”는 구절에서 절정에 달했다.

케네디 취임식의 또 다른 화제는 모자였다. 이전 대통령들은 모두 취임식 때 중절모를 썼다. 하지만 케네디는 멋진 머릿결을 자랑이라도 하듯 모자를 벗고 연설했다. 모자업계는 경악했다. 실제 케네디 취임식 이후 중절모 인기는 급락했다.

미국의 초대 대통령인 조지 워싱턴의 1793년 재선 취임사는 불과 135개 단어였다. 2분 만에 끝났다. 하지만 군더더기없는 그의 취임사는 역사의 명연설로 남아 있다.

“다시 한 번 조국의 부름을 받았다. 재임 기간 중 자발적으로든 고의적으로든 어떤 경우에도 헌법의 명령을 어긴 사실이 드러나면 나는 오늘 이 의식의 증인인 국민 모두의 질책을 달게 받을 것이다.”

반면 9대 윌리엄 해리슨 대통령의 취임사는 8500여 단어나 됐다. 연설문 읽는 데만 2시간 넘게 걸렸다. 그러나 어떤 내용이었는지 기억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대신 강추위 속의 장시간 연설로 해리슨 대통령은 폐렴에 걸려 한 달 뒤 사망했다.

조지 W 부시 대통령의 2001년 취임사는 ‘자유(freedom)’에 대한 찬양 일색이었다. 같은 단어를 27번 사용했고, 형용사(free)까지 합하면 자유라는 말은 45차례나 들어갔다. 그리고 이는 재임 중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강경 노선으로 이어졌다. 취임사에서 그의 정치적 지향점을 그대로 드러난 셈이다. ‘동북아’라는 말을 취임사에서 18번이나 쓴 뒤 ‘동북아 균형자론’으로 나아간 노무현 대통령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오늘은 이명박 대통령의 취임식 날이다. 역대 대통령 취임사와 차별화되는 명연설을 기대해도 좋을 것이라 한다. 역사에 남는 명연설도 좋고 거창한 수사(修辭)도 좋다. 하지만 국민이 진정 원하는 건 명확한 비전이다. 그래야 자신감, 에너지, 엔도르핀이 솟을 수 있다. 국민의 냉엄한 심판은 이미 시작됐다. 

김현기 도쿄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