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나 답답한 남자야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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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호 36면

서른일곱 살을 먹는 동안 많지도, 적지도 않은 연애 이력을 쌓았다. 연애를 시작한 이유는 늘 비슷했다. 외적 매력이 가장 컸고, 취향과 호기심 등이 그 뒤를 이었다. 이건 남들과 같다. 생각해볼 만한 건 헤어지자는 말을 들은 이유다. “자긴 너무 답답해.” 그녀들이 이렇게 말하고 떠난 건 아니지만 만나는 동안 곧잘 이런 말을 들었던 나는 안다. 그 답답함이 오작교를 끊었다는 걸.

나를 버린 그녀들이 했던 ‘답답하다’는 말은 몇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우선 ‘눈치 없어 답답하다’는 답답함이다. 스물일곱 살에 처음 연애를 시작한 나는 연애의 문법을 몰랐다. 1형식밖에 몰랐으니 3형식, 5형식은 꿈도 못 꿨고 직유도 못했으니 은유·비유가 다 뭔가. 그녀가 무슨 말을 기대하는지, 어떤 행동을 해선 안 되는지 몰랐던 나는 번번이 지뢰를 밟았다. 그녀는 화를 냈지만 나는 뭘 잘못했는지 몰라 눈만 껌벅거렸고, 그런 나를 보며 그녀는 가슴을 쳤다.

‘또래 남자들이 다 하는 걸 안 하거나 못 해 답답하다’고 호소한 연인도 있었다. 나는 서른한 살에야 운전면허증을 손에 쥐었다. 그 전에는 조수석에 앉아 그녀가 후진 주차하다 차를 긁는 걸 지켜봐야 했고, 그 와중에도 비디오방 가자고 그랬다.

겨우 면허 따고 호기롭게 그녀의 차를 몰았지만 범퍼 긁어 먹고, 접촉사고 내고, 교차로 한가운데서 경적의 집중포화를 받았다. 게다가 길눈까지 어두워 진입할 길을 놓치고 급기야 ‘임진각’ 이정표까지 마주쳤을 때 차 안에 감돌던 그 복잡미묘한 분위기란 정말 ‘처연하다’고 표현해도 모자람이 없는 것이었다. 이 밖에도 ‘남들 2000㏄ 중형차 몰기 시작하는 나이에 1300㏄ 중고차 사는 답답함’ ‘편들어 줘야 할 때 객관적으로 충고하는 답답함’ 등 몇 가지가 더 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이제부터다. 답답한 남자, ‘착한 남자 콤플렉스’ 가진 남자도 구원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이다. 나, 새로운 여자를 만났다. 그런데 지금까지 ‘답답하다’는 소리 한번도 안 들었다.

오히려 그녀는 내가 왜 답답한지 모르겠단다. 내가 유턴 차선을 놓쳐 꽉 막히는 강남 대로를 한 블록 더 가도, 예매가 귀찮아 그냥 극장 나왔다가 표 없어 돌아가도, 앞으로의 꿈이 ‘기자 일을 최대한 오래 하는 것’이라고 해도, 지금 타는 차를 경차로 바꾸고 싶다고 해도 그녀는 내가 답답하지 않단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얼마 전 후배가 그랬다. “선배는 갈릴레오 갈릴레이예요. 자신은 언제나 옳다고 믿잖아요.” 맞다. 지금까지 난 내가 답답한 남자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데 알게 모르게 지난 연애에서 상처 받았나 보다. 답답해 죽겠다는 원망의 눈빛이 아니라 내 앞에 있는 사람을 자랑스러워하는 눈망울 앞에서 나는 작은 치유의 기적을 느꼈다. 한마디로, 구원받았다. 나는 『죄와 벌』의 라스콜리니코프다. 시베리아 유형지로 떠나도 나를 따라주는 소냐가 있다.

세상의 모든 답답한 남자, 착한 남자 콤플렉스를 가진 남자들에게 권하고 싶다. 조금 더 기다려 보라고. 당신의 답답함을 전혀 답답하다고 생각하지 않는 여자를 만나면 그간의 응어리가 한번에 풀릴 거라고. 그건 환희에 가까울 테니 기대해도 좋다고. 나의 답답함을 돌아보게 해준 지난 연인들에게도 감사를 전한다. 사진 중앙포토


현직 남성 잡지 기자인 송원석씨는 ‘신사, 좀 노는 오빠, 그냥 남자’를 구분 짓<게 하는 ‘매너’의 정체를 파악, 효과적인 정보를 소개할 것입니다.< h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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