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외교의 순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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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외교는 「주권국가간에 합의를 끌어내는 흥정의 과정」이라고 한다.당사자가 셋 이상일 때를 「국제외교」내지 「다변외교」로 부른다.50년대 유엔주재 미국대사를 지낸 어니스트 그로스는 다변외교의 수칙(守則)으로 다섯가지를 제시했다.「입장 은 강경하되행동은 점잖게」가 첫째다.「남들이 보는 앞에서 친구끼리의 흥정을 삼가라」가 둘째다.「뒷문을 열어놓지 않는 한 앞문을 닫지 말라」가 셋째다.「시의적절한 논의일 때만이 협의(consulting)다.시기를 놓친 논의는 모욕( insulting)임을 명심하라」가 넷째다.「상대방을 이끌되 절대로 몰아붙이지 말라」가 다섯째다.
다변외교의 목적은 어느 두 당사자만이 아니고 모든 당사자의 공통이익을 찾아내는 데 있다.「다변외교」일수록 공개적인 흥정과토론은 「외교」가 못된다고 한다.제2대 유엔사무총장 다그 하마슐드가 명성을 날린 이유로 두가지가 꼽힌다.조용 한 협상으로 일관했고 많은 국가들의 공통이익을 대변하려 항상 노력했다는 점이다. 북한 경수로를 둘러싼 다자간(多者間)흥정은 이 「다변외교」의 기본구도에서 볼 때 「외교」이전(以前)상태다.합리보다 「무리」(無理)가 지배한다.북한핵 동결에 가장 민감한 미국이 경수로 제공에 돈 한푼 안내고 한국과 일본등에 손을 벌 리는 자세가 첫번째 무리다.한국과는 상대를 안하고 미국만 붙들고 얘기하겠다는 북한측 자세가 두번째 무리다.북한체제는 머지않아 무너질 것이며 남한에 흡수통일될 것으로 믿는 한국의 경직화된 이데올로기적 북한관(觀)이 세번째 무리다.
중국과 러시아는 한국과 수교했다.북한과 미국,북한과 일본간에그에 상응(相應)하는 관계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주변상황이 또하나의 무리로 지적된다.
서로의 실체가 존중되지 않는 외교는 「외교」일 수가 없다.푸줏간에서 고기를 갈색 포장지에 싸듯 경수로를 표지없는 종이에 싸 북한에 들여보내면 된다는 식의 미국측「브라운 페이퍼 해결방안」은 그로스의「협의」가 아닌 「모욕」에 가깝다.
남북한은 서로를 싫어하고 한국과 일본간에,중국과 일본간에,러시아와 중국간에 뿌리깊은 적대감등 동북아 외교구도는구조적 문제투성이다.이들간의 지혜로운 조화가 궁극의 외교과제다.
「다변외교」의 순리(順理) 회복과 함께 경수로「꼬리표 너머」를 내다보는 「세계화 외교」의 비전과 그 정치적 용기가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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