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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생중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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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24시간 보도채널 CNN은 1991년 걸프전을 계기로 세계적 방송사로 부상했다. ‘CNN 라이브’로 상징되는, 생중계와 현장 화면이라는 방송 저널리즘의 전형도 만들었다. 물론 비판도 있었다. 전쟁을, TV로 중계하는 시각적 이벤트처럼 다룬다는 비판이다. 실제 TV 화면 속 스텔스기 폭격 장면은 시청자들에게 갤러그 게임처럼 받아들여졌고 전쟁에 대한 미국인의 죄책감을 덜어냈다는 지적도 나왔다.

9·11 때도 CNN은 빨랐다. 첫 비행기가 세계무역센터 북쪽 빌딩에 충돌하는 장면을 ‘브레이킹 뉴스’를 통해 제일 먼저 보도했다. 현장에 있던 시민이 캠코더로 찍은 영상을 입수한 것이다. 7분 뒤 두 번째 비행기가 세계무역센터 남쪽 빌딩에 부딪쳤을 때는 현장에 나간 거의 모든 TV 뉴스가 이를 실시간 방송했다. 이어 건물이 무너져내리고 피범벅이 된 사람들이 울부짖는 장면들이 시시각각 생중계됐다. 그저 블록버스터 영화에서나 봤던 대참사가 눈앞의 현실로 나타나자 미국인들의 충격은 더욱 커졌다.

이후 쏟아진 많은 영화는 이 ‘CNN 속보’ 이미지를 활용해 9·11에 대한 심리적 충격을 드러냈다. 1898년 SF소설을 리메이크한 스티븐 스필버그의 ‘우주전쟁’이 대표적이다. 내용은 외계인 침공이지만 건물이 무너지고 사람들이 우왕좌왕하는 장면은 명백히 9·11 때 TV 화면을 떠올리게 한다. 맨해튼 배경의 괴수영화 ‘클로버필드’는 아예 CNN 속보 스타일로 영화를 찍었다. 참사 현장에서 캠코더나 휴대전화로 거칠게 흔들리며 찍는 것처럼 전체 영화를 촬영한 것이다.

미국 대통령의 암살 테러를 소재로 한 영화 ‘밴티지 포인트’는 TV 생중계에 대한 끔찍한 시나리오를 보여준다. 정상회담에서 연설하던 대통령이 가슴에 총탄을 맞고, 연단이 폭파되며 리포트 중이던 기자마저 사망하는 장면이 전 세계에 생중계되는 것이다.

온 국민을 충격에 빠뜨린 이번 숭례문 화재사건도 실시간 전국에 중계됐다. 삼풍백화점, 성수대교, 대구지하철 참사 같은 끔찍한 재난이 있었지만 실시간 TV카메라에 잡히지는 않았다. 실시간 생중계로는 2004년 낙산사 화재가 기억에 남는다. 당시 천년 고찰이 타들어가고 동종이 화염에 녹아내리는 장면을 무기력하게 지켜봤던 시청자들이 이번에는 무너지는 국보 1호를 봐야 했다. 현장의 탄식과 외마디 비명도 전파를 타며 시청자의 가슴을 후벼팠다. 이 같은 숭례문의 최후 이미지는 아마도 오랫동안 쉽게 잊혀지지 않을 듯하다.

양성희 문화스포츠부문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