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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둑칼럼>관철동시대 31.프로들의 현실인식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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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0면

「조훈현의 세계제패」와 「이창호의 등장」은 프로세계를 한동안장미빛으로 물들였다.그 거품이 가라앉자 곧 좌절감이 몰려왔고,동시에 현실의 눈을 번쩍 뜨게 만들었다.
스스로「엑스트라」를 자처해온 일반프로들은 조훈현.서봉수 두 주인공에 대해 감정이 미묘했다.86년에 이런 일이 있었다.바둑의 명소 운당여관에서 曺.徐의 도전기가 열렸는데 프로기사가 단한명도 찾아오지 않았다.여관종업원만이 이 날의 유일한 관전객이었다.축제같던 도전기가 曺.徐시대가 길어지면서 외면받아왔다고는하지만 이럴 수가 있나 싶었다.
『맨날 둘이 두는데 재미없잖아요.』 한물간 프로도 아닌 젊은프로들이 이렇게 말했다.이기려면 상대를 연구해야한다.그게 승부세계의 기본이다.「재미」란 단어는 아마추어의 용어다.조치훈은 목숨을 걸고 둔다는데 재미가 웬말인가.하지만 이때는 그랬다.
프로들 사이엔 曺.徐에 대한 미움같은 것이 광범위하게 깔려있었다.상금탄다고 술한잔 사는 것도 아닌데 괜히 가서 자리를 빛내줄게 뭐있느냐는 응석 비슷한 감정도 깔려 있었다.「언젠가는 나도…」하는 막연한 야심도 버리지 않았다.
그런데 이창호와 유창혁이 찬물을 끼얹었다.특히 10대초반의 이창호는 고약한 존재였다.프로기사들은 비로소 자신들이「프로」라는 사실에 절실히 눈뜨기 시작했다.프로면장은 이제부터 실력대로살아보라는 허가서일뿐 생계해결 보장서는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했다.
바둑의 프로는 우리나라에서 아마추어보다 먼저 조직된 유일한 프로다.다른 분야,예를 들어 야구의 경우 아마추어가 먼저 시작하고 수십년후에 프로가 생겼지만 바둑은 50년전에 프로가 생겼는데 지금도 아마추어조직은 없다.
이런 연고로 야구에서의「방출」같은 것이 프로바둑엔 없다.젊은기사에게 3점실력의 70대 노장 프로들도 원하면 시합에 나오고그것이 오히려 미덕으로 비쳐지는 동네였다.오랜 세월 한국기원은프로들이 모여 동고동락하는 장소였던 것이다.
그러나 조훈현은 혼자 힘으로 세계를 제패하여 수억원을 벌어들였다.한판에 10만원 받는 예선전에 출전했다가 단칼에 떨어져 야간열차를 타고 귀향하는 지방기사의 가슴엔 자연 먹구름이 몰려왔다. 언젠가는… 하고 야심을 품었지만 15세 된 이창호가 벌써 저 야단인데 도대체 될 것같지가 않았다.
비로소 프로들은 생업에 눈뜨기 시작했다.강의.출판.해설.개인지도.바둑교실등 많은 분야로 돈벌이에 나섰다.「토너먼트 기사」나 「보급기사」란 용어가 80년대말 처음 등장했다.대국료를 받으면 동료들과 빈털터리가 될 때까지 마시고 내일은 몰라라하던 김인.홍종현.김희중등 낭만파의 시대는 이렇게 끝났다.때마침 막걸리.소주에 생태찌개가 보글거리던 관철동은 네온이 번쩍이는 젊음의 거리로 바뀌었다.밤이 돼도 갈곳이 없었고, 변한 세상을 탄식하다가 부득이 현실로 돌아오지 않 을수 없었다.2년전 10대강자 이상훈(李相勳)이『나는 이창호를 못 이길 것 같다.아무래도 은퇴해야겠다』는 발언을 해 화제가 된적이 있었다.건방지다는 평가도 있었지만 무섭게 냉정한 얘기였다.한국기원은 더이상 동고동락의 장소가 아니었다 .승부세계는 냉엄했고 프로는 오직 「홀로」서야 했다.프로바둑 40여년만의 변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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