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성호 기자의 현문우답 <33> 성인의 지혜, 왜 안보일까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0면

# 풍경1=‘삼십 개의 바퀴살이 하나의 곡에 모이는데, / 그 텅 빈 공간이 있어서 / 수레의 기능이 있게 된다. / 찰흙을 빚어 그릇을 만드는데, / 그 텅 빈 공간이 있어서 / 그릇의 기능이 있게 된다. / 문과 창문을 내어 방문을 만드는데, / 그 텅 빈 공간이 있어서 방의 기능이 있게 된다.’

노자의 도덕경(道德經·11번째 장)에 나오는 한 대목입니다. 우리는 늘 ‘눈에 보이는 것’‘손에 잡히는 것’을 좇습니다. 그리고 그걸 붙잡거나, 쌓으려 합니다. 그래서 숱한 이들의 삶의 방식은 비슷합니다. ‘붙들고, 붙들고, 붙들기’ 혹은 ‘쌓고, 쌓고, 쌓기’에서 몇 발짝 벗어나질 못합니다.

그런데 노자는 엉뚱한 얘길 합니다. 바로 ‘비어있음의 기능성’이죠. 그 ‘비어있음’으로 인해 수레가 굴러가고, 그릇에 음식이 담기고, 방 안에 몸을 뉘일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한 없음의 흐름, 없음의 움직임, 없음의 작용을 보라고 노자는 말합니다. 그게 바로 ‘노자의 지혜’겠죠.

# 풍경2=‘어떠한 눈도 본 적이 없고, 어떠한 귀도 들은 적이 없으며, 사람의 마음에도 떠오른 적이 없는 것들을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을 위하여 마련해 두셨다.(고린도전서 2장9절)’ 사도 바울은 성경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게 바로 ‘하나님의 지혜’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지혜’는 참 묘합니다. 왜냐고요?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이죠. 어떤 눈도, 어떤 귀도, 어떤 마음도 접한 적이 없으니까요. 왜 그럴까요. 우리의 눈, 우리의 귀, 우리의 마음이 ‘세상의 지혜’를 붙들고 있기 때문이라고 하네요. 그래서 볼 수가 없다고 합니다.

# 풍경3=황산곡(1045~1105)은 스승 소동파와 함께 송나라를 대표하는 시인이죠. 어느날 황산곡이 회당선사(晦堂禪師)에게 물었습니다. “공자는 『논어』에서 ‘나는 너희에게 아무 것도 감춘 것이 없다’고 했습니다. 마친 선(禪)과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회당선사는 잠시 생각에 잠겼죠. 그리고 법당을 나섰습니다. 황산곡은 급히 회당의 뒤를 따랐죠. 둘은 좁은 산길로 들어섰죠. 길섶 계수나무의 꽃향기가 코를 찔렀습니다. 회당선사가 말했죠. “어떻습니까. 이 꽃향기, 좋지 않습니까.” 황산곡이 답했죠. “네, 아주 좋습니다.” 그러자 회당이 말했습니다. “자 보시지요. 아무 것도 감춘 것이 없지 않습니까.”

사람들은 투덜댑니다. 노자의 지혜도, 하나님의 지혜도, 공자의 지혜도, 부처의 지혜도 보이지 않는다고 말이죠. 지독히도 꼭꼭 숨겨 놓았다고 말이죠. 그런데도 공자와 회당선사는 “아무 것도 감춘 게 없다”고 합니다.

궁금하네요. 그럼 무엇이 그런 ‘지혜’를 가릴까요. 사도 바울은 “우리가 세상의 지혜를 붙들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럼 ‘세상의 지혜’는 뭘까요. 바로 내가 생각하는 지혜, 내가 생각하는 슬기겠죠. 그게 바로 ‘에고의 지혜’니까요. 그런데 에고는 일종의 ‘선글라스’죠. 그걸 통해 보는 세상은 ‘있는 그대로의 세상’이 아닙니다. 선글라스는 늘 ‘내가 만든 세상, 내가 보는 방식의 세상’을 보여주는 법이니까요.

결국 부처님과 하나님, 노자와 공자의 지혜는 이미 드러나 있는 것이네요. 다만 나의 선글라스가 그걸 가리고 있을 뿐이군요. 그럼 어떻할까요. 벗어야죠. 칠흑같은 선글라스를 말이죠. 그걸 벗는 과정이 바로 영성의 길이고, 참선이고, 수행이고, 묵상이겠죠.

그리고 벗는 순간, 알겠죠. “하나님의 지혜는 없는 곳 없이 있구나” “부처님의 지혜는 본래부터 드러나 있구나” “노자의 지혜는 ‘아무 것도 하지 않음’이 아니구나” “공자의 지혜는 감춘 것이 없구나.” 가슴절절하게 그걸 보겠죠.

백성호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