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봉작&상영작]'휴먼 스테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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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먼 스테인★★★☆(만점 ★ 5개)

때는 르윈스키 스캔들로 온 미국이 시끌벅적하던 1998년. 사람들은 모이기만 하면 모두 재판관이 되어 대통령을 단죄하려 들었다. 클린턴을 빼고는 모두 '오점(stain)'없는 사람들만 있었다. 유대인 최초로 고전문학과 교수가 돼 매사추세츠주 아테네 대학을 명문대학으로 만든 콜만 실크(앤서니 홉킨스)도 그런 순결한 사람들 중 하나였다. 수업 중에 내뱉은 "스푸크(유령이란 뜻, 속어로는 검둥이)"란 말이 인종차별적 발언이라며 자신에게 화살이 되어 되돌아오기 전까진 말이다. 그 때문에 그는 교수직은 물론, 심장마비로 아내마저 잃는다.

억울함에 치를 떨다 명예를 회복하겠다는 의욕마저 꺾이던 즈음, 콜만은 퍼니아(니콜 키드먼.사진)라는 여인을 만나 서로의 육체에 빠져든다. 대학 잡역부 일, 농장 젖짜기 등 허드렛일을 하고 있던 퍼니아는 인생 자체가 오점 투성이인 인물. 의붓 아버지에게 성추행당해 가출하고, 베트남 참전 군인이었던 남편은 몽둥이 세례를 하기 일쑤였다.

게다가 아이들을 화재로 잃고, 전남편은 자식들을 죽였다며 스토커처럼 따라다니며 괴롭힌다. 인생의 전 시기를 걸쳐 행복한 순간이 단 한번도 없었던 퍼니아는 "행동은 잡념을 없앤다"며 노동으로 자신을 혹사시킨다.

영화 속 60대와 30대라는 나이 차이, 존경받던 전직 교수와 임시직 여성이라는 관계 등은 클린턴과 르윈스키를 연상시킨다. 그러나 퓰리처상 수상작인 필립 로스의 소설 '더 휴먼 스테인'은 르윈스키 스캔들을 표적으로 삼은 게 아니라 타인을 멋대로 도마 위에 올려놓는 사회나 남의 시선 때문에 자신을 괴롭히던 오점 많은 사람들에 대해 말하고 싶었으리라. 전쟁의 기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자식의 죽음을 아내 탓으로만 돌리는 퍼니아의 전 남편(에드 해리스), 사람들을 피해 후미진 시골 별장에 칩거하다 콜만과 친구가 되고 그의 인생을 추적하게 된 작가 네이던(게리 시니즈)은 모두 인생의 상처에서 자유롭지 못한 인물들이다.

이처럼 감추고 싶은 과거, 잊고 싶은 기억을 가진 사람들이 세상에는 얼마나 많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남의 '겨 묻은 것'만 탓한다. 젊은 뜨내기 여자와 사랑에 빠진 콜만을 옛 동료 교수들은 흉을 보고, 늙은 남자와 정분이 난 퍼니아에게 전남편은 죽어라 욕을 해댄다.

특히 인종 차별 누명을 쓴 콜만이 알고 보니 유대인이 아닌, 피부가 유난히 흰 흑인이었으며 그 사실을 죽은 아내에게조차 비밀로 했다는 설정은 "누구나 오점이 있다"는 영화의 주제를 가장 강렬하게 반영한다. 말 한 마디로 불행을 처음 맛봐야 했다고 여겨졌던 그도 사실은 자신이 쳐놓은 올가미에 스스로 걸려든 가장 오점 많은 인간이었기 때문이다.

홍수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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