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 김산하·한민 형제 나란히 만화책 펴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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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깔깔대고 뒤로 쓰러질 정도로 웃기는 것만이 유머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흠, 그래, 이런 얘기도 있지, 하면서 씩 웃을 수 있는 것도 만화가 줄 수 있는 유머가 아닐까요."

신인 만화가 김산하(28)씨의 말이다. 만화가가 되는 여러 길 가운데 김씨는 인터넷.잡지 연재를 거치지 않고 곧바로 단행본을 펴내는 방법을 택했다. 최근 나온'세상 모르는 사람들을 위한 지혜'(새만화책.7천5백원)가 그의 데뷔작이다.

이 책의 전반부는 다람쥐.사자.원숭이.토끼.거북.해마 등 각종 동물들이 암수 짝을 지어 등장해 남녀관계의 다양한 표정을 표현하는 한 컷씩의 그림으로 구성돼 있다. 언뜻 평온해 보이는 이런 동물그림과 달리 곁들여진 문장은 좋아하는 여자에게 사랑을 고백했다 거절당한 남자의 처절한 독백이 이어진다. 예컨대 사람의 옷을 입은 개미 남녀가 숲속을 한가로이 거니는 그림 밑에 '애인 따위는 필요없다'는 문장이 따라붙는 식이다. 그림과 글 사이의 이런 충돌은 연애 초기에, 나아가 인간관계에서 겪을 수 있는 다양한 상념을 독자의 머릿속에 떠올리게 한다.

책의 후반부는 영화의 스틸사진을 모아놓은 듯 여러 이미지가 이어지는 작은 칸 만화의 틈틈이에 글을 흘리는 형식으로 구성돼있다. 각각의 에피소드는 '야, 그건 아무 것도 아니야''시간이 해결해줄거다''하다보면 된다'같은 일상에서 흔히 주고받는 말들을 제목으로 삼았는데, 실은 이런 말에 선뜻 동의하지 못하는 주인공의 심경이 그려진다. '세상 모르는 사람들'을 내세운 책 전체의 제목에서는 작가 스스로 '세상물정 모른다'고 자처하는 인상을 주지만, 작가는 세상의 상식과는 조금 다른 자신의 생각을 집요하게 그려낸다.

"외교관이었던 아버지를 따라 초등학교 5학년 때까지 덴마크.스리랑카에서 국제학교를 다녔어요. '땡땡의 모험''스누피'같은 유럽.미국만화를 많이 보고 좋아했죠."

이런 배경은 김씨의 만화가 다소 이질적으로 보일 수 있는 이유 중의 하나다. 실은 김씨는 동물생태학을 전공, 올 2월 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았고 현재 침팬지 같은 영장류 연구를 위해 유학을 준비 중인 자연과학도다. "어려서부터 동물과 그림을 좋아했어요. 집 옥상에 따로 어항을 두고 귀뚜라미.개구리.여치.딱정벌레 같은 걸 길렀죠. 동물에 대한 책이라면 뭐든지 사서 종류별로 줄줄 이름을 외울 정도였죠. 그림도 꾸준히 그려왔지만 4남매 가운데 바로 밑에 동생이 미술을 전공하겠다니까 저는 다른 길로 가려고 했는데, 결국 같은 길이 됐네요."

대학에서 산업디자인을 전공하는 동생 한민(25)씨 역시 이번에 형과 나란히 단행본'유리피데스에게'(새만화책.1만1천원)를 펴내며 만화가로 데뷔했다.'유리피데스에게'는 고대 그리스 때 연극에 쓰이던 가면을 만들던 장인을 주인공으로 삼아 사람들이 한낱 소품으로 치부하는 가면이 연극에서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보여주는 이야기다. 색연필의 질감을 살린 그림체나 줄거리가 이어지는 장편형식이라는 점에서 형 산하씨의 작품과 다르지만, 만화라는 장르에 진지한 생각을 담으려는 건 두 사람의 공통된 시도다. 흥미롭게도 '유리피데스에게'에서 연극 관객은 보통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가면을 만드는 장인은 형 산하씨의 만화에서처럼 동물의 얼굴을 하고 있다. 한민씨는 현재 군복무를 대신해 남미의 페루에서 국제협력단의 일원으로 봉사활동 중이다.

"동생은 진작부터 만화가가 되겠다고 작정했어요. 저요? 만화는 제 전공과 전혀 다른 분야가 아니에요. 대학원에서 줄곧 까치를 연구했는데, 둥지에서 알을 꺼내면 보고서에는 몇 개, 몇 g밖에 적히지 않지만 거기에 얼마나 많은 드라마가 있다고요. 실험실 안에만 머무는 게 과학자의 활동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제 전공이 다른 만화가와 다른 새로운 콘텐츠가 되지 않을까요."

이후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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