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대통령직 성패, 취임사가 갈랐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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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호 16면

앞줄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워싱턴, 케네디, 프랭클린 루스벨트, 레이건, 링컨, 제퍼슨.

새 대통령의 취임식은 신·구 권력의 이동을 보여주는 한 편의 드라마다. 새 정부가 들어서고, 권력의 정상에 섰던 지도자가 평범한 시민으로 돌아가는 시대극을 상징하는 자리다. 새 대통령은 자신의 존재 자체로 ‘살아 있는 권력체’다. 말 한마디, 동작 하나가 정치적 메시지로 해석되고 역사의 페이지 속에 남는다.

 200여 년의 역사를 가진 미국 대통령들의 성적표를 보면 위대한 대통령에게는 역사에 남을 취임사가 있다. 훌륭한 취임사는 시대정신을 짚어내고 새 정부의 과제와 목표·비전을 제시한다. 한마디로 국정 운영의 나침반이자 주문서와 같다.

에이브러햄 링컨은 따뜻한 가슴을 가진 탁월한 연설가였다. 남북전쟁 뒤 재선(再選)에 성공한 링컨은 “모든 악의를 버리고, 모두에 대해 사랑을…”이라는 말로 전쟁의 상처를 치유하자고 호소했다. 대공황 시기에 집권한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은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두려움 그 자체”라며 국난 극복에 매진했다.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당신이 국가를 위해 무엇을 할 것인지 물어라”는 호소는 아직도 회자(膾炙)되고 있다.

 취임사는 갈라진 국론을 하나로 묶고 국민의 희망과 자부심·고통을 대변하는 외침이 될 수 있다. 공화주의자였던 토머스 제퍼슨은 연방제 강화를 강력히 반대해 워싱턴마저 내전을 걱정할 정도였다. 제퍼슨은 취임사에서 모든 우려를 한 방에 날렸다. “우리 모두는 공화주의자이고 연방주의자다”라고.

하지만 모든 대통령이 명취임사를 한 것은 아니다. 장밋빛 희망과 공허한 계획을 나열하다 냉소를 받는 사례도 얼마든지 있다. 워싱턴은 135개의 단어로 된 2기 취임사를 통해 ‘헌법에 대한 확고한 충성’을 다짐했다. 반면 장군 출신인 윌리엄 H 해리슨은 1841년 무려 8445개의 단어를 동원해 취임사를 만들었다.

취임식 날 폭우가 쏟아지는 가운데 1시간45분간 연설한 해리슨은 폐렴에 걸려 한 달 만에 사망했다. 현대 정치에서 취임사는 이제 대통령 개인이 아니라 보좌 팀의 몫이 됐다. 각 분야 실무위원회에서 만든 초안을 연설 팀이 수십 번 다듬는다.

대통령은 근엄한 표정으로 TV카메라 앞에서 이를 낭독한다. 그러다 보니 취임사의 생명력과 활기는 떨어진다. 3년 전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2기 취임 행사 비용으로 4000만 달러를 썼다. 그러나 ‘자유의 확산’을 골자로 한 취임사는 이라크 전쟁, 국론 분열, 민생경제 등의 역사적 소재를 잘 살리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2차 대전 후 취임한 미 대통령들의 연설은 정형화 추세를 보이고 있다. 인사말을 한 뒤 현실 상황을 진단하고 자신의 목표, 국내외 과제, 자유·평화·애국심을 호소하는 게 정석이다. 트루먼·아이젠하워·케네디·닉슨·레이건의 취임사를 분석한 결과 평균 단어 수는 1934개였다. 케네디(1375개 단어)가 가장 짧고 레이건(2374개 단어)이 가장 길었다. 연설에 소요된 시간은 20∼25분이었다.

가장 자주 쓴 단어는 자유(freedom), 세계(world·globe), 국가(nation), 국민(people), 평화(peace) 순이었다. 취임사는 또한 시대 상황을 반영한다. 냉전 시대에는 공산주의·민주주의·평화·무력과 같은 용어를 많이 썼다. 70년대 경제난을 거친 레이건은 자유·정부·힘이란 단어를 쓰면서 레이거노믹스 구상을 언급했다. 역대 대통령들은 우리(we, our, us)란 단어를 즐겨 썼다. 국민통합과 자신의 신념에 대한 공감대 확산을 노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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