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있는아침] ‘옥수수 수프를 먹는 아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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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옥수수 수프를 먹는 아침’-이제니(1972~ )

옥수수 수프를 먹는 아침
탁자가 필요하고
이왕이면 둥글고 따뜻한 탁자가 필요하고
의자가 필요하고
이왕이면 둥글고 따뜻한 의자가 필요하고
그릇이 필요하고
이왕이면 둥글고 따뜻한 그릇이 필요하고
누군가가 필요하고
이왕이면 둥글고 따뜻한 누군가가 필요하고
옥수수 알갱이는 노란색
알갱이 알갱이 알갱이 수프 속에 둥둥둥 떠 있고
알갱이마다 생각나는 얼굴 몇 개 죽었고 사라졌고 지워졌고
이제는 없으니까 알갱이를 먹는 겁니다
둥글고 따뜻한 알갱이를 먹는 겁니다
국물도 있어요 국물도 맛있어요
옥수수 알갱이는 노란색
알갱이 알갱이 알갱이 흘리지 마세요 흘리면 슬퍼져요
나는 알갱이처럼 말을 아끼는 사람
지금도 아침이면 아껴야 할 알갱이들의 목록을 수첩에 적는다
어째서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알갱이에 대해 이미 알고 있는 걸까
알갱이 알갱이 당신이 알갱이를 볼 수 있는 건
알갱이를 볼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알갱이 알갱이 알갱이 옥수수 알갱이는 노란색
둥글고 따뜻한 알갱이 알갱이 알갱이
어쩌면 언제든 볼 수 있다고 믿고 싶은
조금은 그리운 알갱이 알갱이 알갱이


이런 아침도 있군요. 옥수수 수프 속에 둥둥 떠 있는 알갱이들, 그걸 하나씩 건져 먹을 때마다 소중한 사람들의 얼굴이 스칩니다. 이제는 없지만 언제든 볼 수 있다고 믿고 싶은. 그러니 탁자도, 의자도, 그릇도 둥글고 따뜻해야죠. 그 누군가도 말입니다. 오, 아껴야 할 알갱이들의 목록을 수첩에 적는 아침이면, 옥수수 수프는 국물까지도 맛있겠습니다. <박형준ㆍ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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