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 '제 12회 삼성화재배 세계바둑오픈'] 호기심이 유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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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제 12회 삼성화재배 세계바둑오픈'

<4강전 3국 하이라이트>
○·구 리 9단(중국) ●·박영훈 9단(한국)

 장면 1(125~142)=‘부동의 반집’은 역전이 불가능하다. 상당히 우세한 건 분명한데 이기는 코스가 불확실한 바둑-역전은 이런 판에서 생겨난다.

박영훈 9단이 129로 돌파하면서 ‘백승’으로 꽁꽁 굳어가던 판에 혼란의 그림자가 드리워지기 시작했다. 구리는 왜 스스로 이 코스를 선택한 것일까. 백△로 하변을 돌파하는 대신 A로 틀어막았더라면 2집반-3집반 우세는 부동이었는데 왜 자진해 변화를 일으켰을까. 성격 탓이다. 이렇게 갈라 놓으면 중앙과 하변 흑 전체가 엷어지고 자연 여러 가지 잔재미들이 생겨난다. 그 재미들을 요리해 보고 싶은 호기심에 불쑥 발을 들이민 것이다.

‘견고한 방어벽’을 중시했다면 134도 135로 넘는 쪽을 선택했을 것이다. 한데 구리는 산술적인 크기보다는 134 쪽에 내재된 ‘플러스 알파’를 중시하고 있다. 이긴 바둑인데 무슨 재미를 그렇게 더 보려는 것일까. 하지만 성격은 어쩔 수 없다. 그건 거의 운명적이다.

장면 2(143~153)=이리하여 판은 조금씩 복잡해지고 골인 지점은 점점 멀어지고 있다. 구리 쪽에서 처음 등장한 작은 실수는 148. 이 수는 149에 붙여 B로 막을 때 148에 두는 게 더 나았다. 산술적인 차이는 한 집 정도. 하지만 이런 섬세한 마무리는 구리가 아닌 박영훈의 전문 분야다. 구리는 호기심 때문에 길을 잘못 든 것이다.

박치문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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