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중앙 시평

어느 '테러리스트'와의 대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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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지난 주말 비행기를 탔다. 신문 말석에 칼럼을 끼적이는 사실을 알았던지 옆자리의 승객이 목례를 했다. 간밤의 불침을 오수로 달래려는 참에 그의 입에서 날벼락이 떨어졌다.

"자폭해야 해요. 그 길밖에 없어요. "

"뭐, 자폭요?"

에구머니, 하필이면 테러리스트와 한 비행기를 타다니…. 테러 소탕전에 나선 부시 대통령에서, 사회안전망에 의탁할 처자식 얼굴까지 인생 마지막의 화면이 주마등처럼 망막을 누볐다.

*** 국회 지능지수에 연민이

"이게 국회고, 이게 정칩니까?"

"예에? 후유. "

그러니까 그의 테러 발언은 지역구 의석 15개를 늘린 전날 국회의 선거구 획정 표결을 겨냥한 울분의 표출이었다. 그러나 비행기 자폭 대신 국회 자폭에 안도하는 나는 얼마나 이기적이고 비애국적인 녀석인가. 평소 나는 우리 정치가 '웃긴다'고 여겨왔다. 그런데 지난 2월 9일 이래 '무섭다'고 생각을 고쳤다. 칠레와의 자유무역협정 비준, 이라크 파병 동의 등 초미의 안건을 밀치고 부패 혐의의 서청원 의원 석방을 의결했기 때문이다. 그 낯 두껍고 염치없는 행동의 저변에는 언론이 며칠 떠들다 말고, 국민이 며칠 식식대다가 제풀에 스러지면 그것으로 상황 끝이라는 계산이 깔렸을 터이다. 그리고 그 무서운 계산은 지금까지 대개 맞아 떨어졌다. 솔직히 어느 유권자가 기표소에서 자유무역협정이니 파병 따위를 들추며 붓두껍을 누르겠는가?

2월 27일 밤 뉴스를 보면서 문득 우리 정치가 '불쌍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혹시 "자장면 15그릇 추가요" 하면 주인이 신바람나겠지만, "의석 15개 추가요" 보도에 신날 국민은 별로 없을 것이다. 그런데도 국회는 그것을 해치웠다. 그 낯 뜨거운 짓을 또 벌이면서 총선 투표까지 한참 남았다고 생각했으리라. 그러나 더는 기다릴 수 없는 일도 있었으니, 긴요한 민생 법안 20개를 팽개치고 의원들이 의사당을 떠났기 때문이다. 물론 이때까지는 제주 1석 환원에 전국구 10석 '추가의 추가'는 상상도 못했다. 나의 연민은 국회의 지능지수, 그러니까 '고도의 양심불량지수'에 대한 것이었다. 의원이 의원 맘대로 하는데 언론이든 국민이든 네까짓 것들이 어쩔래 하는 배짱은 어제 오늘의 습관이 아니다. 이런 사람들을 더 늘리자는 것인가?

꼴보수 철밥통 의원들의 작태는 그렇다고 치자. 그러면 개혁을 염불처럼 외고 다니는 의원들은 어떤가? 아마도 늙었다거나 지지율이 오르지 않는다는 이유로 제1당 대표를 사실상 몰아내고 지역구마저 빼앗는 것이 이 시대의 개혁 현실이다. 제2당 대표 역시 적의 아성으로 선거구마저 옮겨가며 '살신'의 자세를 취했지만 젊고 이쁜(!) 얼굴을 내세워 선거를 치르자고 반발이 심했다. 그것은 또 하나의 개혁 포퓰리즘으로 불릴 만하다. 개혁이 흘러 넘쳐 개혁 깃발로 도배한 제3당에는 이런 고민이 없겠지만, 금융감독원에서의 국회 청문회를 몸으로 막는 요상스러운 개혁도 있었다. 나는 외세마저(?) 끌어들여 동료의 목을 치는 공천 개혁에 적극 찬동한다. 그러나 개혁이 그처럼 시퍼런데도 배짱대로 선거구를 늘린 처사는 어떻게 이해할 도리가 없다.

*** 공천 개혁에 밥그릇 개혁도

대표를 바꾸고 공천 물을 가는 것만 개혁이고, 밥그릇 늘리기를 막는 것은 개혁이 아니란 말인가? 밥그릇을 늘린 것은 꼴보수 쪽이지, 개혁파가 아니라는 모범 답변이 가능하다. 그러나 개혁파가 기를 쓰고 반대했더라도 그 안건이 통과되었을까? 혹시 못 본 체해도 손해볼 것 없는 장사라는 계산 아니었을까? 지도부 개혁, 공천 개혁 못지않게 밥그릇 개혁도 뒤따랐던들 정직한 개혁이란 박수를 받았을 것이다. 이번에는 내가 물었다.

"자폭 뒤에는 어쩌지요?"

"누가 돼도 이만 못하겠어요?"

그는 아주 무책임한 테러리스트였다. 부디 세상 인심이 그의 편이 아니기를!

정운영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