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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운하의 핵심 가치를 밝혀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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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중국 베이징시 근교에 퉁저우(通州)라는 곳이 있다. 이곳에 한강 넓이만 한 물줄기가 흐른다. 이것이 베이징(北京)과 항저우(杭州)를 잇는 1794㎞에 달하는 경항대운하의 출발 지점이다. 경부고속도로가 428㎞이므로 서울~부산을 두 번 왕복해야 경항대운하의 총길이와 얼추 맞을 만큼 어마어마한 물줄기다. 퉁저우 현지에 살고 있는 김성웅(金成雄)씨에 따르면 운하가 정비되기 전 개울에 불과하던 것이 갑자기 한강물처럼 됐다고 한다.

 물론 아직도 마무리 공사는 진행 중이다. 포클레인들이 강바닥을 파느라 여념이 없다. 하지만 이미 옛날 부산 영도다리처럼 위로 들어 올릴 수 있는 다리도 새로 세워졌고 물줄기 양안으로는 산책로도 깔끔하게 정비했다. 아울러 ‘운하문화광장’도 조성돼 광장 바닥엔 기원전 690년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자그마치 2700여 년에 걸친 대운하 공사의 역사적 궤적을 연대기 순으로 부조해 놓았다.

중국은 지역 특성상 거의 모든 강이 서쪽에서 동쪽으로 흐른다. 따라서 남북으로 연결되는 물길이 절실했다. 그 절실함 때문에 기원전 690년 이래 춘추전국시대의 각 나라에서 운하를 파기 시작했다. 특히 오나라 부차가 만든 한구((邗溝)와 위나라 혜왕이 만든 홍구(鴻溝)가 이 시기에 만들어진 대표적 운하다. 그후 5대 10국의 위진남북조를 통일한 수나라는 연인원 100만 명 이상을 동원해 근 30년 동안 집중적으로 운하를 팠다. 581년 수 문제가 부민거(富民渠)를 개착했고 610년에는 수 양제가 강남하(江南河)를 개통했다. 하지만 대운하를 판 수나라는 망하고 말았다.

그러나 수나라를 뒤이은 당나라와 송나라는 그 운하 덕을 톡톡히 봤다. 실제로 당나라가 막강한 경제력과 군사력으로 전성기를 누릴 수 있었던 것은 남방의 풍부한 물자를 수도 장안(지금의 시안)까지 날라다 준 운하 덕분이었다. 송나라는 수도를 개봉으로 옮겼는데 이곳으로 수 양제가 개통한 통제거(通濟渠)가 지나갔기 때문이다. 그만큼 대운하는 곧 왕조의 명줄이었다.

이후 이민족 최초로 중원을 장악한 몽골족의 원 세조 쿠빌라이는 수도를 북방의 대도(大都), 즉 베이징으로 정한 후 수리전문가인 곽수경을 기용해 베이징과 퉁저우 사이의 통혜하(通惠河)를 개착하는 등 경항대운하 전 노선을 관통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황하를 그대로 대운하 노선으로 삼았던 원대의 경항대운하는 황하가 수시로 범람하는 까닭에 매우 불안정했다. 그래서 명·청 시대에도 황하노선을 피해 가는 새로운 운하 공사가 계속됐다. 특히 청대의 강희제는 1687년 황하를 피해 황하 이북 요제에서 누제에 이르는 중하(中河)를 개통함으로써 보다 안정적인 경항대운하를 완성하게 됐다. 결국 춘추전국시대 이래 자그마치 2400여 년의 세월이 걸린 셈이다.

본래 중국의 대운하는 남방의 식량과 물자를 북방으로 조달하는 ‘남량북조(南糧北調)’를 그 존재 이유로 삼았다. 하지만 지금 대운하의 목적은 ‘남수북조(南水北調)’, 즉 남쪽의 풍부한 물을 심각한 물부족 상태인 북쪽으로 끌어댄다는 취지다. 그만큼 “물 문제의 해결 없이는 중국의 미래도 없다”는 중국 지도부의 단호한 입장을 중국인들이 깊이 공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에게는 그 공감대가 없다. 두 주 후면 새 정부가 출범한다. 그리고 여전히 새 정부에서 가장 논란이 되는 프로젝트 중 하나가 대운하다. 하지만 우리에겐 중국인들의 ‘남수북조’처럼 왜 대운하를 해야 하는지를 단 한마디로 설명해 줄 그 무엇이 없다. 대운하를 하려거든 먼저 그것부터 찾아야 할 것이다. 그것은 단순히 캐치프레이즈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국민의 깊은 공감을 구하는 일이며 대운하의 핵심 가치를 찾는 일이기 때문이다.

정진홍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