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과 여…흑과 백’ 흥행은 계속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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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대통령이란 자리는 취임 첫날부터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하는 자리다.” 경험과 경륜을 강조하는 힐러리 클린턴(뉴욕주) 상원의원.

“이라크전에 대한 판단을 잘못한 클린턴 상원의원이 취임 첫날부터 과연 올바른 결정을 할 수 있겠는가.” 힐러리가 이라크전에 찬성표를 던진 사실을 물고 늘어지는 버락 오바마(일리노이주) 상원의원.

미국 민주당 대통령 후보 경선의 분수령이 될 ‘수퍼 화요일’(5일)의 대결전을 닷새 앞둔 지난달 31일(현지시간). 로스앤젤레스의 할리우드 코닥 시어터에서 열린 힐러리와 오바마의 TV토론은 미 대통령 선거사에 남을 역사적 이벤트였다. 대선 후보 티켓을 놓고 남성과 여성이 TV토론에서 맞붙은 것도 미 역사상 처음이지만 흑인과 백인이 일대일로 격돌한 것도 처음이다.

당초 예정시간을 20분이나 넘겨 1시간50분 동안 진행된 이날 토론은 정당과 지지자, 미디어와 할리우드식 쇼 비즈니스가 총동원된 성공적 ‘정치 이벤트’의 진수를 보여 줬다. 아카데미상 시상식으로 유명한 코닥 시어터 주변은 양측에서 몰려든 지지자 수천 명의 함성과 율동에 묻혀 축제 현장을 방불케 했다. 빈자리 없이 꽉 들어찬 토론회장에는 다이언 키턴, 피어스 브로스넌, 리어나도 디캐프리오 등 낯익은 할리우드 스타들의 모습도 눈에 띄었다. 토론회를 주관한 CNN은 ‘시청률 대박’을 터뜨렸다.

네거티브 공방이 뜨거울 것이라던 당초 예상과 달리 토론은 의료보험과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담보대출) 사태, 이민 정책, 이라크 문제 등 이슈와 정책 중심으로 진행됐다. 전반적으로 차분하면서도 열띤 분위기였다. 웃음과 박수, 환호도 끊이지 않았다.

첫 번째 이슈로 제기된 의료보험 개혁 문제를 둘러싸고 토론의 전반부가 길게 이어졌으나 기술적 차이를 제외하고는 두 사람 사이에 차별성을 느끼기 어려웠다.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와 경기 침체에 대한 대응책 문제, 이민 정책 등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힐러리의 이라크전 찬성 전력을 둘러싸고 잠시 공방이 오갔으나 조기 철군을 지지하는 입장에서는 일치했다.

부시 부자(父子)에 이어 클린턴 부부가 대를 이어 백악관 주인이 될 가능성을 문제 삼는 질문이 나오자 힐러리는 “첫 번째 부시를 청소하는 데 클린턴이 필요했던 것처럼 두 번째 부시를 청소하려면 또 한 명의 클린턴이 필요한 것 아니냐”고 재치 있게 받아넘겨 박수를 받았다.

힐러리-오바마 또는 오바마-힐러리를 대통령·부통령 후보로 하는 ‘드림 티켓’ 아이디어가 나오자 오바마는 “클린턴 의원을 존경하지만 아직 그 문제를 말하는 것은 시기상조”라고 빠져나갔다. 그러나 “‘드림팀 내각’을 짜는 문제라면 최고의 능력과 성실성을 갖추고 있으면서도, 예스맨이나 예스우먼이 아니라 ‘노(NO)’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들로 백악관을 채울 것”이라고 말해 박수를 받았다.

코닥 시어터 앞에 설치된 대형 전광판으로 토론을 지켜본 로버트 곤살레스(36·식당업)는 “힐러리든 오바마든 둘 다 미 대통령 자격이 있다는 것을 충분히 입증한 토론회였다”며 “둘 다 잘했기 때문에 누구를 찍을지 더 고민스러워졌다”고 말했다.

토론회를 지켜본 미국 기자들은 이날 민주당 토론이 전날 로스앤젤레스 인근 시미 밸리에 있는 로널드 레이건 도서관에서 열린 공화당 후보들의 TV토론을 압도했다는 데 대부분 동의했다. 11월 대선이 민주당 후보의 최종 승리로 판가름 난다면 ‘수퍼 화요일’ 직전의 이번 할리우드 토론회는 2008년 미국 대선의 향방을 가늠한 결정적 토론회로 기록될 것이라는 분석도 나왔다.

로스앤젤레스=배명복 논설위원·순회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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