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원강사가 출장 수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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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일 도쿄 스기나미(杉竝)구 와다(和田)중학교 2학년 영어시간. “T로 시작해 T로 끝나는, T로 가득 찬 단어는 무엇일까요?” 학생들이 답을 찾느라 수군수군했다. 틀린 답이 이어지자 선생님이 말했다. “답은 teapot(차 주전자)입니다.” 학생들은 일제히 “아~” 하며 탄성을 질렀다. 평소와 달리 학생들의 수업 참여가 적극적이다.

이날 수업을 맡은 사람은 학교 선생님이 아니라 대형 입시학원인 ‘사픽스’의 유명 강사. 성적 상위권 학생들만 모아 출장 수업을 한 것이다. 수업이 끝난 뒤 학생들은 “학교 수업시간과는 달리 진도가 빠르면서도 학생들 입장에서 쉽게 이해를 돕는 강의 방식”이라고 크게 만족했다.

일본의 공립학교에서 처음 시도된 ‘학교 내 학원수업’이다. 그동안 지방자치단체가 비용을 부담해 공립학교 보충수업에 학원 강사를 초청하는 경우는 종종 있었다. 하지만 학생이 돈을 내고 학교에서 학원식 수업을 받도록 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국어·수학 두 과목을 들으면 한 달 수업료가 1만8000엔, 영어까지 포함한 세 과목을 수강하면 2만4000엔이다. 보통 학원의 절반 수준이다. 학교 교실을 이용하기 때문이다. 방과 후인 월·수·금요일 오후 6시30분부터 3시간 동안 수업을 한다. 희망자는 토요일 오전에도 강의를 들을 수 있다.

‘학교 내 학원수업’은 후지와라 가즈히로(藤原和博) 교장의 아이디어다. 취업·교육 관련 기업인 리크루트 출신인 그는 2004년 교장에 취임하자마자 “일본의 공교육이 학생에 대한 서비스를 제대로 제공하지 못하고 있다”며 다양한 시도를 해왔다. 외부 강사를 교사로 쓰고, 게임기도 활용했다.

이번 야간 학원수업도 “현 공교육 제도는 ‘평준화’라는 명분 아래 학력이 뛰어난 학생을 그대로 방치하고 있다”는 그의 소신에 따른 것이다. 성적 상위권 학생의 학력을 더 키워주는 것도 엄연한 공교육의 역할인 만큼 공교육이 자발적으로 학원의 장점을 도입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도쿄도 교육위원회는 “기회의 균등이라는 의무교육의 취지에 어긋난다”며 후지와라 교장의 구상에 반대했다. 그러자 스기나미구 교육위원회와 학부모들이 반발했다. 학부모들은 “어차피 중학생의 60% 이상이 학원에 다니고 있는 현실을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일본 언론들은 이날 와다중학교의 수업을 ‘공교육의 모험’이라고 평가했다. 그러면서 “이번 시도가 ‘유토리(여유)교육’의 실패로 학원에 의존할 수밖에 없게 된 일본의 공교육을 자극하는 특효약이 될지 주목된다”고 보도했다.

도쿄=김현기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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