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말 기독교계 '시온산 제국' 독립선언·헌법공포 등 反日운동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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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1945년 일제 패망 직전 극심한 탄압 속에서도 일부 기독교계가 일본군의 패전을 확신하며 반일(反日)운동을 벌여왔음을 보여주는 문서가 공개됐다.

국사편찬위원회(위원장 이만열)는 27일 "45년 5월 경북 청송군에서 발생한 '시온산 제국'사건의 전말을 보여주는 자료를 이달 초 미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에서 찾아냈다"고 밝혔다.

자료는 45년 6월 조선총독부가 도쿄의 일본 내무성 경보국장에게 보낸 첩보 내용을 미 전쟁성 산하 SSA(Signal Security Agency.적국의 무선통신을 감청하고 암호문서를 해독하던 첩보기관)가 입수, 생산한 극비 문서들이다. 일제의 강압에 굴복해 신사참배를 결의하고 전쟁에 협력하던 기성 교회에 강하게 반발한 신자들이 종말론적이고 반일적인 교리를 갖고 있던 '시온산 제국'에 가입해 활동하다 관련자 15명이 당국에 체포됐다는 내용이다. 종단의 공식 명칭은 '시온산 성일제국(聖逸帝國)'으로, 장로회 계통 성경학교를 다닌 박동기씨가 창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시온산 제국'은 일본 패배.연합군 승리를 예상했으며, 이에 따라 일제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하고 헌법도 공포했다. 또 신자 600여명을 장관.군사령관.국회의장.군수 및 '일본총독'(주일본 조선총독)에 임명했다. 이들은 국가(國歌)를 만들고 연합군 상륙을 환영하기 위해 '시온 왕국기' 1600개도 제작했으나 일제에 발각돼 체포됐다고 문서는 기록했다. 박동기.정운권 등 체포된 이들은 해방 후 석방됐다.

문서는 이 사건을 "신흥종교적 색채가 짙으나 기독교도들의 미국.영국 선호와 반일감정에 의해 촉발됐기 때문에 특히 주목할 만하다"고 평가했다. 미국이 일본의 패망 후에 대비해 한국 내 우호적 세력들의 움직임에 관심을 쏟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시온산 제국' 사건은 탁명환씨 등이 관련 연구서를 내기도 했으나 구체적인 문서로 전말이 밝혀지기는 이번이 처음이라고 국사편찬위는 밝혔다. 비록 한 종교단체의 집단행동이기는 하지만 독립.헌법공포.연합군 환영준비 등으로 보아 '대담한 민족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국사편찬위가 발굴한 자료에는 새롭게 밝혀진 독립운동 관련 문서도 포함돼 있다. 45년 4월 29일 함흥 형무소(교도소)에 구금돼 있던 1천명 이상의 죄수가 폭동을 일으켜 간수 9명을 살해하고 구치소에 불을 지른 뒤 '조선 독립'을 외치다 진압됐다는 내용이다. 이 자료 역시 극비문서로 분류돼 있었다. 국사편찬위는 "함흥 형무소 폭동사건은 일제 말기의 전형적인 항일민족운동"이라며 "그러나 그간 학계에서는 별로 주목하지 않았으며, 미국의 정보당국 문서에서 이런 사실이 발견되기는 처음"이라고 설명했다.

김창호 학술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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