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 민족자결주의 확인-本社현대연구소발굴 梨花莊문서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4면

3.1민족운동이 각계각층,각 지역으로 확산되는데 가장 중요한역할을 수행했던 것은 학생과 농민들 중심으로 조직된 다양한 형태의 단체나 비밀결사들이었다.이들은 각종 전단(傳單).신문등의인쇄물을 제작,배포하여 독립사상을 고취시키고 만세시위에 참여할것을 촉구하는 활동을 했다.그러나 이들의 활동은 일제의 탄압으로 발각되었을 경우에만 일부 기록이 남아있고 상당부분은 역사의뒤편에 묻혀있다.
그런 점에서 이번에 본사 현대사연구소가 입수한 신문과 전단들은 그동안 이름만 전해졌을 뿐 그 실체가 불분명했던 3.1민족운동시기 신문이나 비밀단체의 실상을 파악하는데 유용한 자료다.
3.1운동 중에 우후죽순격으로 발간된 신문은 거의 등사물로 전국에서 약 30종,서울 시내에서만 10여종 이상이 발행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이중 3.1운동 초기 서울에 뿌려진 신문으로『조선독립신문』(朝鮮獨立新聞 제1호,2호,6호,9 호,9호 부록,11호,12호,17호,특별호,호외),『국민신보』(國民新報 제5호),『자유민보』(自由民報 제1호,2호),『진민보』(震民報제1호),『자유신종보』(自由晨鍾報 제16호)등이 이번에 발굴됐다. 이 가운데 특히 관심을 모으는 것은 을사오적(乙巳五賊)중의 한사람인 이완용(李完用)의 명의로 된 경고문이다.이 경고문은 3.1운동 발발 직후 전국적인 독립 열망을 잠재우기 위해 쓰여진 것으로 이 운동에 참여한 사람은 목숨까지 박탈 하는 무거운 형벌을 내리겠다고 위협하는 내용이다.
그동안 일부 공개됐던『조선독립신문』은 보성 법률상업학교장 윤익선(尹益善)의 명의로 3월 1일 창간호가 나온후 6월22일까지 발간돼 3.1운동을 추진하는데 제일 큰 구실을 했다.
이러한 신문들은 인도주의와 민족자결주의에 입각해 독립을 쟁취할 것을 호소하고 있다는 점에서 공통된 내용을 담고 있다.
가장 늦게까지 나온『자유신종보』(제16호,11월2일)가「상해임시정부가 프랑스 관헌에게 폐지명령을 당했다」는 일본신문의 기사를 반박,상해임정이 의연히 존재하고 있음을 밝히면서「상해특전」(上海特電)을 싣고 있는 것이 주목된다.당시 국내 민중의 임시정부에 대한 기대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3.1민족운동 당시 신문들이 발간된 현상에 대해 윤병석(尹炳奭.인하대)교수는『일제의 언론.출판 탄압을 뚫고 각종 신문이 발간되기 시작한 것은 자유.독립운동을 쟁취하는데 언론의 역할이높아진 것을 의미하며 일본이 한국인의 언론자유를 부분적으로나마허용하지 않을 수 없게 하는 계기가 됐다』고 평가했다.
한편 신문과 같이 쏟아져 나온 각종 전단들도 세계정세의 변화와 각지에서 전개되고 있는 독립투쟁 상황을 알려 전 국민이 분기,일본의 질곡으로부터 벗어나 독립국가를 건설할 것을 촉구해 3.1운동의 대중화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특히「세계를 살펴보니 인도주의의 세계요,시대를 관찰하니 민족자결시대로다」라고 주장한「告二千萬同胞」란 이름의 전단은 3.1운동이 민족자결주의에 영향을 받았음을 다시 확인시켜줌과 동시에제국주의 열강들에 의해 흥정되던 당시 국제정세를 냉철하게 파악하지 못한 한계를 그대로 보여준다.
또 조선독립경성단 명의로 나온 전단에는 자유가(自由歌)가 실려 있어 시위 과정에서 불렸던 노래의 일면을 확인할 수 있다.
이정은(李廷銀.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연구원은 3.1민족운동이 전개되면서 신문이나 전단이 대량으로 뿌려진 것에 대해『운동의 지도부들이 대중과의 연계를 절감하면서 다양한 매체를 이용했음을보여주는 증거』라고 평가했다.
「민족자결」의 정신은 잊혀진 채 겉치레 행사만이 진행되고,역사학계에서조차 관심대상에서 멀어지고 있는 지금의 현실에서 이번자료발굴을 계기로 76년전 그날의 정신을 되새기고 3.1민족운동에 대한 연구가 활발해지기를 기대해본다.
〈鄭昌 鉉 현대사전문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