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시평>諜報戰시대의 우리 安企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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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존 르카레는 냉전시대의 미소(美蘇)스파이전을 가장 재미있고 문학성 높게 구성한 작가다.그의 대표작 『추운 지방에서 온 스파이』는 영화로 되어 베를린장벽을 둘러싼 미소간의 불꽃 튀는 스파이戰이 얼마나 처절했던가를 생생히 보여준다.소 련(蘇聯)이붕괴된 다음해 그는 미국(美國) 문학단체가 주관한 모임에서 앞으로는 자신의 냉전시대 스파이 소설이 인구(人口)에 회자(膾炙)되는 일이 없어질테니 얼마나 다행이냐고 조크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요즘 세상 돌아가는 일을 보면 르카레식 스파이전이 사라진게 아니라 더 은밀히,더 깊숙이 국경도 없이 횡행하고 있음을 알게된다.지금 미국.프랑스 양국간의 외교 문제로 비화된 스파이 소환 문제만 봐도 옛날 미소냉전시대의 스파이 전과는 달리그들의 활약과 활동상이 무소불위(無所不爲)로 치닫고 있음을 실감한다.美중앙정보국(CIA)요원들이 프랑스 정부에까지 침투해 고위관리들을 매수하고 첨단 통신정보를 빼냈다고 한다.프랑스는 전례없이 강경한 자세로 미국 스파이들 의 첩보활동을 소상히 공개하고 그들의 프랑스 소환까지 요구하고 있어 양국간 외교문제가심상치 않게 돌아가고 있다.
지난해 봄 일이다.브라질 아마존 지역의 14억달러 통신시설을수주하기 위해 프랑스 회사가 브라질 관리들에게 뇌물을 주었다는정보를 CIA는 입수한다.이 사실을 CIA가 뉴욕 타임스에 슬쩍 흘리자 통신 사업권은 자연 프랑스에서 미국 회사쪽으로 넘어갔다.미국만이 스파이전을 쓰는게 아니다.보잉사나 록히드사를 포함한 미국내 굴지의 49개 기업체에 대한 자세한 내막이 프랑스스파이에 의해 소상히 작성되었다는 사실이 알려져 미국 기업들이경악한 적도 있다.이번 美.佛 간 스파이 소환문제도 대만에 미사일을 파는 문제로 양국 스파이들이 피나는 물밑 싸움을 벌인 결과라는 관측이다.
냉전시대에는 적과 동지의 구별이나마 있었지만 이젠 국경없는 무한 경제 정보 첩보전에 들어간 것이다.남의 나라 첨단기술 정보를 빼내 자기나라 기업에 전해주고 제 나라 대기업의 해외 진출을 돕기 위해 물불 가리지 않고 상대방 나라 회 사의 비리까지 추적하며,외국기업의 진출을 막기 위해 국가가 주도적으로 총역량을 동원하는 숨가쁜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최선진 민주 국가라는 나라들이 이렇듯 스파이까지 동원하며 자국 경제를 보호하고 있는 판에 우리의 안기부(安企部)는 도대체무얼하고 있는가.최근 우리 안기부는 지자체 선거연기 문제에 대한 여론파악을 지시한 문건이 한 야당의원에 의해 밝혀지면서 당시 부장이 하루 아침에 해임되고 안기부의 정치관여문제가 지금껏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도 놀란다고 워낙 어려운 시절을 살아와서 안기부 일을 못믿는 측면이있긴 하다.
그러나 현행 지자체 선거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고 상정한다면 그에 필요한 조처를 하는건 정부로선 당연히 검토할 일이고 국가의 안전과 정보를 총괄하는 기관으로서는 한번쯤 상황을 알아볼만도 하지 않은가.
지금도 지자체 선거를 둘러싼 행정구조 개편 문제로 나라 안팎이 시끄럽다.선거 임박해서 고치느니 못고치느니 따질게 아니라 당시 문제 문건이 나돌때 보다 확실하게 여론 조사를 해서 개편의 불가피성을 내부적으로 건의했다면 이런 소모적 혼란은 미리 막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안기부가 정치에 시시콜콜 개입해서 왕년의 정보정치.공작정치를 재현하라는 말은 결코 아니다.적어도 국가안전과 중대 기밀을 관장하는 정부기관이라면 국가 중대 사안에 대해 여론동향 분석을 통해 개선점 이 무엇인지정도는 파악할수 있는게 국가 관리란 차원에서 필요한 것이 아닐까.
***工作여부떠나 한심 그나마 동향을 알아보라는 지시가 어떻게 밖으로 유출될 수 있는지 도대체 기초적 국가 기밀 관리 능력에 의심이 가지 않을 수 없다.이러고서 어찌 북한의 동향에 대한 치밀한 자료를 수집.분석할 수 있을 것이고,국경없는 경제정보전에서 국가 이익을 위해 생사를 건 첩보전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인지 걱정스런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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