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거기 그녀가 서있는걸 보았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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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집을 나서면서,나는 어머니에게 어쩌면 오늘밤엔 집에 못들어올지도 모른다고 말했다.어머니가 기가 막힌다는 얼굴을 했다.
『써니하고 같이 자겠다는 뜻이 아니라구요.』 택시를 타고 서교동으로 달려갔다.써니엄마가 문을 따주고 써니가 이층의 자기방에서 문을 걸어잠그고 있다고 그랬다.
『나야 달수야.문 좀 열어봐.』 그러자 써니가 문을 따주었다. 주선이와 호텔 로비를 걸어나오는데 중년의 남녀가 팔짱을 낀채 엘리베이터를 내리더라고 했다.
그 둘은 불륜 관계인 것이 틀림없었다는 거였다.
그래서 더러운 것들이라고 한마디 해주었을 뿐이라는 거였다.
중년남자가 얼굴을 붉히며 비키라고 소리쳤고 그래서 싸움이 돼버렸다는게 써니의 말이었다.
『넌 미친 년이야.이건 널 욕하는 말이 아니야.정말이라니까.
』 써니가 침대에 몸을 반쯤 기대고 있다가 걸상에 앉은 나를 노려보았다.
그렇지만 특별히 다른 말을 하지는 않았다.써니는 내가 밤늦게달려와준 것에 어느정도 고마워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써니야 넌 나를 사랑해.그리구 내가 널 사랑한다고 믿고 있어.그런데도 그냥은 같이 못자.콘돔같은게 없으면 말이야.맞아?』 써니하고 같이 자고 싶어서 한 말이 아니었다.그럴만한 분위기가 전혀 아니었다.나는 그점에 대한 써니의 생각을 분명하게 알고 싶었다.
다행히 써니가 즉각 대꾸해주었다.
『사랑한다고 꼭 같이 자야 하는건 아니야.그렇지만 남자는 참을 수 없으니까… 해야 한다면 할 수 없는 거지.그렇지만 병이생기면 안되니까 그게 필요한 거야.난 안해도 사랑할 수 있다구.안하고도 사랑하는 게 가장 순수한 사랑이니까.』 『하는 건 무조건 더러운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그걸 몰라서 묻니.』『그건 니 생각을 알겠어.다른 이야길 하자구.넌 니가 정상이 아니라는 걸 정말 모르겠어? 병원에 가면 고칠 수도 있어.』 『난 미치지 않았어.내 주위에 미친 사람들이 많은게 탈이지.』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난 그만 집에 가야겠어.내 말 잘 생각해봐.넌 치료를 받아야 해.그러면 정상으로 돌아올 수도 있다구.그러면 난 너하고 같이 살아도 좋아.』 아래층으로 혼자 내려와서 써니엄마에게 인사했더니,괜찮으면 자고 가도 좋다고 그랬다.나는 학기말 고사중이기 때문에 돌아가봐야 한다고 말하고 써니네 집을 나서다가 멈춰서서 덧붙였다.
『아무래도 의사에게 보이는 게 좋겠어요.빨리요.』 그때가 학기말 고사중이라는 말은 사실이었다.나는 소라의 노트를 빌려서 벼락치기 공부를 하고 한 과목씩 겨우 겨우 때워나갔다.
다시 써니엄마의 전화가 밤에 걸려온 건 학기말 고사가 끝나기하루전이었다.써니엄마는 우선 미안하다고 인사하고 말했다.
『오늘 낮에 써니가 다쳤어.지금은 병원에 있는데… 아니 정신병원이 아니라… 내가 차에 태우고 가는데… 달리는 차에서 뛰어내렸거든.정신병원에 가는 길이라는걸 말하자마자 갑자기 차에서 뛰어내리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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