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체청소년원정대, 폭설로 등정 실패 … 눈사태 뚫고 무사 철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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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정대원들이 눈 속에서 하산을 서두르고 있다. 이 눈은 고도가 낮은 지역에서 비로 바뀌면서 대원들의 옷과 배낭과 신발에 스며들어 하산을 어렵게 했다. 백승화(16·대구 정화여고2) 대원은 “눈앞에서 벌어지는 눈사태를 목격하는 순간 자연 앞에서 인간이 얼마나 하찮은 존재인가를 깨닫게 됐다”고 했다. 이들은 10시간 동안 22km를 걸어 상감차티 인가에 도착했다. [사진=안성식 기자]

 “여기서 돌아서야 한다니.”

 두려움 속에서 대원들의 눈가가 붉어졌다. 철수 결정을 내린 이충직 대장은 그런 대원들을 차마 볼 수 없어 눈에 파묻혀 가는 ‘다르와 탑’(해발 4300m)으로 시선을 돌렸다.

 ‘2008 한국로체청소년원정대’(대장 이충직·후원 중앙일보·KBS, 협찬 기아자동차·버그하우스)는 20일 오전 최종 목적지인 인도 히말라야 다르와 탑 직전에서 철수를 결정했다. 15세에서 19세까지의 청소년대원 24명이 7일 한국을 출발해 14일 동안 걸어온 길이었다. 고통스러운 고산 증세를 참아가며 올라 왔지만 표고차 200여m 정상을 앞두고 돌아서야 했다. 어쩔 수 없었다. 폭설이 3일 연속 쏟아졌다. 19일엔 눈이 대원들의 가슴까지 쌓였다. 20일 아침 산이 무너지는 듯한 소리가 텐트를 흔들었다. “자연 앞에서 인간은 이토록 무력하구나.” 무너져 내리는 눈사태를 보며 백승화(16·대구 정화여고 2년) 대원이 몸서리를 쳤다. 포터(짐꾼)들이 “더 이상 갈 수 없다”며 등정을 거부했다. 대원들이 동요했다. 차진철 부대장이 “큰일 났다. 눈사태가 계속 발생하고 있다”며 이 대장의 판단을 기다렸다. “돌아가자.” 이 대장은 철수를 지시했다. 여지가 없었다. 모두 훈련 과정에서 익힌 대로 각자 맡은 임무를 챙겼다. 말이 철수지 사실 탈출이었다. 하늘에서 난데없이 은행 알만 한 우박이 쏟아져 대원들의 뺨을 때렸다. 살을 에는 눈보라가 시야를 가렸다. 경사가 심한 곳은 눈사태가 일어나 눈앞에서 길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말뚝을 박고 로프를 깔아 길을 만들었다. 어디가 하늘이고 어디가 길인지 구분조차 되지 않는 길을 기어서, 매달려서 가야만 했다.연방 넘어지고 발이 부르터 제대로 걷지도 못하던 이현지(16·가평 청심국제고 1년) 대원은 “나는 그래도 괜찮다. 찢어진 구두를 신고 짐을 나르는 포터들을 보니 소외된 사람들을 돕기 위해 열심히 공부해야겠다”며 부쩍 큰 모습을 보였다.

 해발 3000m 지점. “살기 위해서는 먹어야 한다.” 이 대장의 호통 속에 대원들은 눈 속에 쪼그리고 앉아 얼음처럼 얼어버린 점심을 억지로 밀어 넣었다. 어둠을 뚫고 베브라(1800m)에 도착했을 때 눈은 비로 바뀌었다. 옷과 배낭이 젖었고 발은 불어터졌다. 번개가 번뜩이고 천둥소리는 산을 흔들었다. 야영을 할 수는 없었다. 텐트를 치기도 어려웠지만 설사 친다고 해도 텐트 속에서 밤을 보내기엔 너무 추웠다. 내쳐 8km 떨어진 상감차티까지 가기로 했다. 지친 대원들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열기가 헤드랜턴의 불빛에 춤을 추었다.

 고통이 등을 밀었다. ‘걷지 않으면 산을 내려갈 수 없다. 세상 누구도 나를 대신할 수 없으며, 내 인생은 결국 내가 책임져야 한다’는 사실이 어린 대원들의 등을 밀었다. 눈을 헤치며 걸은 하산 길 10시간, 22km. 마침내 사람이 사는 상감차티의 희미한 불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끔찍했지만 서로를 격려하며 마침내 이겨냈다. 정상에 오른 것보다 더 값진, 평생 잊지 못할 경험을 했다.” 힘겹게 내려가던 김동민(16·성남시 분당 이우고 1년) 대원의 말에 다른 대원들이 머리를 끄덕였다. 비록 육체의 발은 정상을 밟지 못했지만 대신 정신의 발걸음이 더 높은 인생의 산 하나를 오르고 있었다.

인도 우타르카시=안성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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