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이홍구칼럼

경제 못지않게 중요한 정치 살리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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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우리가 지향하는 다원적 민주공동체의 건설은 끊임없는 국민 통합의 노력을 필수로 한다. 한국 사회는 정치·경제·문화·지역 등 여러 차원에서 규격화된 일원화보다는 자유로운 다원성을 인정하고 포용하는 민주규범을 수용하고 있다. 그러한 다원적 민주공동체는 이를 구성하고 있는 국민·집단·지역·계층들이 비교적 공정하게 참여할 수 있는 균형 잡힌 정치참여 제도가 원활하게 작동돼 공동체의 동질성을 위협하는 극심한 빈부격차 등을 예방하고 치유하는 배분의 정의가 국가 운영전략의 중요한 원칙으로 작용할 때 성숙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대한민국이 걸어온 길, 특히 지난 10년을 돌이켜 볼 때 잘못된 국가 과제의 우선순위 선정으로 인해 심각한 국민 분열과 혼란을 초래했던 아쉬움이 없지 않았다.

 많은 희생을 치르며 어렵사리 국가운영의 중심에 서게 된 민주화 세력은 무엇보다도 튼튼한 다원적 민주공동체의 제도를 확립하고 이를 성공적으로 운영하는 데 우선순위를 두었어야 했다. 모든 국민과 계층이 공정하고 균형 있게 국가권력에 참여하며 경제 및 사회 발전의 혜택을 배분받을 수 있는 공동체 건설을 기대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난 두 정부는 그러한 민주화 작업을 마무리짓지 못한 채 민족을 앞세운 남북관계 개선을 최우선 과제로 선정해 전력투구했다. 한 걸음 나아가 스스로를 평화통일 세력으로 자처하며 많은 국민과 정치적 상대를 반평화·반통일 세력으로 규정하고 결과적으로 국민 분열을 고정화시킴으로써 균형 잡힌 정치참여의 신장이나 국민생활, 특히 서민생활의 향상을 실현하는 데 실패했다. 한마디로 국민 통합보다는 분열을 조장했다는 판정을 면하기 어렵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새 정부는 마땅히 건전한 다원적 민주공동체 건설에, 즉 원심력을 풀어놓는 분열의 정치보다는 구심력이 힘을 받는 통합의 정치를 실천해야 하는 시대적 책무에 충실해야 할 것이다. 대선에 이어 총선이 다가오는 선거의 계절에는 선거가 수반하는 경쟁의 열기 때문에 자칫 통합보다는 분열의 역학이 작용할 위험이 크다. 그러나 적어도 5년 앞을, 그리고 그 너머까지 내다보며 새 출발을 기약하는 새 정부로서는 민주공동체의 기틀을 강화하는 데 구체적으로 기여하는 정치적 비전과 전략을 가다듬는 지혜와 용기가 있어야 한다. 다원적 민주공동체의 핵심인 정치권력과 경제적 혜택의 공정한 배분을 가능케 하는 제도와 관행을 정착시키는 데 힘을 쏟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적으로 국민의 일상생활 속에 자리 잡는 공동체의 윤리의식을 확립하는 방향으로 국민적 합의를 이끌어 가야 할 것이다.

 민주공동체는 이를 구성하는 시민 상호 간의 약속과 그 약속을 지키겠다는 의무감이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공정한 정치참여와 사회 및 경제정의의 실현도 결국 공동의 약속을 지키는 시민적 책임이 살아있는 규범으로 작동하는 공동체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근래에 우리 사회에서 잊혀져 가는 듯싶은 시민의 의무나 책임의식을 강조하는 정치문화를 어떻게 키워 가느냐가 한국 정치의 어려운 당면과제다.

이홍구 본사 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