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시평>케이블TV 시대의 영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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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앞으로 사람들은 텔레비전을 볼까,아니면 영화를 볼까,연극을볼까,음악을 들을까,전시장엘 갈까,문학작품을 읽을까 하는 심각한「선택의 고민」에 빠져들게 될 것이다.』 미국과 유럽 몇몇 학자들의 이같은 예견이 등장한 것은 TV가 서서히 대중의 생활속에 파고들기 시작한 30,40년 전의 일이었다.TV가 막강한영향력을 가지고 여러 장르의 예술과 손쉬운 싸움을 벌였던 것이다.그 영향력이 더욱 증대되 면서 TV는「선택의 고민」을 단 두가지로 압축시켰다.『TV냐,아니냐(TV,or not TV)』가 그것이다.
TV의 막강한 영향력때문에 많은 예술이 차츰 설자리를 잃어가고 있는 동안 그래도 영화예술만큼은「불안한 행복」을 누릴수 있었다.대중예술이라는 절대전제에다 똑같은 영상(映像)매체라는 메커니즘의 유사성 탓에 그나마 TV와의 공생(共生) 이 가능했던것이다. 번거롭고 귀찮아 관람을 기피했던 사람들조차 TV를 통한 영화예술의 세계에 끌어들임으로써 적어도 영화예술은 TV로 인한 퇴조(退潮)를 걱정하지 않아도 무방할 것처럼 보였다.
그같은 관점에서 보자면 비디오 메커니즘의 등장도,우리사회에서곧 선보이게 될 유선(有線)TV방송의 시대도 영화예술의 입장에서는 전체 예술속에서 독자적인 위치를 확보할 만한 획기적인 계기로 삼을 만하다.이제 영화예술의 맛에 길들여진 사람들은『영화관엘 갈까,TV영화를 볼까,아니면 비디오 영화를 볼까,케이블 TV의 영화를 볼까』하는 새로운「선택의 고민」에 빠져들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뉴 미디어.멀티 미디어의 시대는 더욱더 많은사람들을 영화에 탐닉케 할 것이고 영화제작자나 수입업자들은 더많은 작품을 공급하기 위해 밤낮을 가리지 않고 뛰어야 할 지경에 이를 것이다.
그러나 한국영화에 관한 한 그것은 장밋빛 환상에 불과할는지도모른다.그 징후로 지금 우리나라의 영화제작업계가 곧 다가올 케이블 TV 시대를 불안과 회의의 눈초리로 바라보면서 깊은 우울속에 잠겨있다는 점을 꼽을수 있다.
케이블 TV 시대가 국산영화 진흥에 획기적 전환점을 마련해주기는 커녕 외국영화와의 격차를 더욱 벌려 오히려 재기불능의 늪에 빠뜨리는 계기가 되지나 않을는지 전전긍긍하고 있는 것이다.
비디오 메커니즘이 우리 생활속에 정착하기 시작했을 때도 그랬다.영화공급체계의 다원화가 국산영화의 설자리를 빼앗는다는 이상한 논리가 영화제작업계를 지배한 것이다.아닌게 아니라 비디오 대여점엘 가보면 국산영화는 가뭄에 콩나듯 구색을 맞추기 위해 드문드문 끼어있고 온통 외국영화 일색이다.「국산영화를 찾는 사람이 이상하게 보일 지경」이라거나「국산영화는 거의 예외없이 포르노성 영화만 찾는다」는 대여업자들의 표현이 비디오업계에서 국산영화의 위상을 한마디로 대변한다.
각 방송사가 경쟁하듯 쏟아내놓고 있는 TV영화도 마찬가지다.
10여편의 영화가 방영된 지난 설연휴의 경우 국산영화가 수적으로 크게 열세였던 점은 그렇다 치더라도 외화쪽이『아마데우스』『패왕별희』『도망자』등 최근의 화제작들이었던데 반해 국산영화는『서편제』정도가 그들에 맞설 만한 작품일뿐『로맨스 빠빠』『장남』등 30,40년 전의 낡디 낡은 필름이거나 수준낮은 영화들로 채워졌다.김승호(金勝鎬).신성일(申星一)등 당대 톱스타들의 한창때 모습을 되돌아보는 것으로 흥미와 호기심의 일부를 충족시켰는지는 몰라도 외국영화들과 시청률 경쟁을 벌이기에는 아무래도 역부족이었다.
***우리업계 분발 기대 정보보다는 오락매체로서의 기능이 강하고,영화와 스포츠가 최고 인기 채널로 등장하게 될 케이블 TV 시대에 막상 주인공이 돼야 할 국산영화가 조연이나 들러리쯤의 역할로 머무르게 되리라는 것은,적어도 이제까지의 상황이 계속되는한 의심 의 여지가 없다.
그런데도 영화업계에서는 외국영화 직배사의 보다 적극적인 공세나 일부 대기업의 영화제작 참여등 주변문제에만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심기일전의 자세가 필요한데도 말이다.무엇보다 영화팬들의 국산영화에 대한 애정과 신뢰를 회복하는 일이 중요하다.케이블 TV시대의 영화를 주도할 만한 영화계 자체의 획기적인 대응방안이 마련되지 않는다면 국산영화는 외화의 시녀(侍女)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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