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달아 높이곰 돋아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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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미인이라기보다는 정갈하게 생긴 사람이었습니다.얼굴만이 아니라 매사에 그랬지요.맺고 끊는 것이 분명하고 총명했습니다.그러니 남편된 자는 꽤나 고달팠지요.』 아리영 아버지는 익살스런 표정으로 웃었다.
『그랜드마 모제스의 화집을 찾아놨습니다.들어가시지요.』 서재로 따라 들어섰다.
벽 두면이 마룻바닥에서 천장까지 책으로 가득하여,이동 사다리로 골라 뽑게 되어있다.
윤기 도는 적갈색 목재와 푸른 기 도는 회색 천으로 조화시킨책상 의자 소파의 일습.아늑하고 지적인 공간 연출이다.
남쪽으로 크게 트인 유리창 밖으로 자귀나무가 보였다.
마당에 심으면 부부간의 우의가 두터워진다는 아름다운 꽃나무.
이 집은 어느 방에서나 자귀나무를 볼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는 모양이다.
유리창 문턱에 빛나는 것이 있다.
색색가지 유리 장식품이다.병아리색 꽃병,보라색 촛대,감색 컵,다홍색 종,옥색 장미,무지개색 돛배….
모두 안으로 함빡 머금은 햇빛을 조금씩 조용히 토하고 있다.
소리없는 빛들의 합창이다.
『집사람은 유리를 사랑했지요.세계 각국을 다니며 모은 것들입니다. 고대에 유리는 보석 이상으로 값진 보석이었어요.요즘은 너무 흔해져 천한 존재가 됐지만, 사실 투명한 그 몸매엔 말할수 없는 매력이 있지 않습니까?』 아리영의 투명한 모습이 떠올랐다. 동시에,자신의 처지와는 너무나 동떨어진 공간에 앉아있는자신이 불가사의했다.
『아리영씨는 늦나봐요.』 멋쩍게 혼잣말하고 일어서려는데,아리영 아버지가 수심에 찬 얼굴로 입을 뗐다.
『실은,내외가 병원엘 갔답니다.』 『병원에요? 왜,누가 편찮으시기라도?』 길례는 도로 소파에 앉았다.
『결혼한지 십년이 지났는데도 아리영은 아기를 갖지 못하고 있습니다.병원에서 들은,내외 모두 아무런 이상이 없다는데 아이가들어서지 않으니 참 답답한 노릇이 아닙니까.원래 아리영 외가 쪽은 자손이 귀한 집안이긴 해도,2대째 외동딸이 나마 이어져 왔지요.』 길례는 자기의 무심함을 자책했다.미모를 지키기 위해일부러 아이를 갖지않는 것쯤으로 억측해왔기 때문이다.
불임(不姙).
이 역시 길례와는 동떨어진 세계의 일이다.
길례는 임신 잘하는 여자다.
남매도 연년생으로 낳았고,그 후로도 몇차례 인공유산까지 했다. 단풍잎 같은 달거리가 비치면, 그제서야 안심하곤 하여 줄곧이십여년을 지나온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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