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인 총재의 한계인가, 신상우호 KBO의 지난 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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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늑대 할아버지’라고 부르면 딱 맞다. 신상우(70) 한국야구위원회(KBO) 총재. 늑대처럼 용맹해서가 아니다. 우화 속의 늑대 소년, 걸핏하면 “늑대가 나타났다”고 소리쳐 마을을 소란하게 만들던 그 소년의 노년기 버전이다. 늑대 할아버지가 지킨 한국프로야구는 지난 2년 동안 참으로 혼란스러웠다. 그래서 ‘정치인 총재의 한계’를 지적하는 목소리도 적잖다.

재정난에 빠진 현대가 KBO에 인수자 알선을 요청한 뒤 1년 동안 세 차례 매각 협상이 실패로 돌아갔다. 농협-STX-KT로 인수 가능 대상이 바뀌는 동안 구단 가치는 땅에 떨어졌다. 현대 선수들을 받아들여 팀을 창단한다던 KT가 11일 백지화를 선언함으로써 프로야구는 7개 구단으로 운영되던 18년 전으로 후퇴할 위기를 맞았다. 도대체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한탕주의ㆍ성과주의ㆍ인맥찾기의 한계

지난해 1월 소공동 롯데호텔. 신상우 총재의 취임 1주년 기자회견이 열렸다. 신 총재는 이 자리에서 프로야구 현안 중 하나인 현대의 연고지 이전 문제 해결과 돔구장 부지 확보와 관련한 플랜을 제시했다. 1월 중으로 수원 잔류 또는 제3의 지역 이동 등 연고 문제를 해결하고 돔 부지도 확보가 가능하다고 했다.

며칠 뒤. 농협중앙회가 현대를 인수한다는 소식이 들렸다. 농협의 서울 입성과 전면 드래프트 실시 등 구체적인 제안까지 나왔다. 신 총재가 힘주어 말한 ‘현대 문제 해결’은 농협의 현대 인수로 결말 나나 싶었다. 그러나 농협은 노조와 주관 부처인 농림부의 반대 등으로 5일 만에 포기를 선언했다.

신 총재의 행보는 늘 비슷하게 반복됐다. 우선 기자회견을 열고 무언가 거창하게 ‘발표’를 한다. 대부분은 상대와의 대화가 설익은 상태에서 먼저 터뜨리는 경우다. 당연히 대화는 원점으로 돌아간다. KBO는 해당 기업에 프로야구에 참여했을 때 어떤 성과와 유ㆍ무형의 효과가 있는지 제대로 된 제안서조차 제출하지 않았다고 한다.

야구위원회 총재가 비싼 호텔을 잡아 놓고 여는 기자회견은 일회성으로 끝나지 않았다. 프로야구 400만 관중 돌파 기념 기자회견이 열린 지난해 9월. 신 총재는 “뻗어나가는 중견기업과 현대 매각을 논의하고 있으며 조만간 발표할 예정”이라고 선언했다. 그날 저녁 모든 언론이 그 ‘뻗어나가는 중견기업’이 STX임을 확인했다. 그러나 STX는 ‘과중한 언론의 관심’을 핑계로 협상을 중단했다.

12월 중순 신 총재는 김시진 현대 감독에게 “크리스마스 전까지는 좋은 소식을 줄 것”이라고 말했다. 신 총재는 크리스마스보다 좀 늦은 12월 27일 KT와 협상 중임을 밝혔다. 그런데 신 총재는 회원 구단에 제대로 통보조차 하지 않고 “가입금 60억원을 내는 조건”이라고 발표해 버렸다. 몇몇 구단의 반발과 언론의 ‘헐값’ 지적이 잇따르자 KT는 11일 긴급이사회를 열어 창단 백지화를 결정했다.

낙하산 인사의 태생적 한계

신상우 식 KBO 운영 방식은 ‘한탕주의’와 ‘성과주의’, 그 내용물은 ‘인맥 찾기’다. 농협과 현대 매각을 논의한 끈도 인맥이었다. 정대근 농협 회장과 ‘막역한 사이’라는 게 전부였다. KT와의 협상 사실을 밝히면서도 신 총재는 “KT 윗사람들을 잘 안다”는 수준의 배경 설명으로 갈음했다.

취임의 배경을 감안하면 신 총재의 인맥에의 집착은 숙명이었을지 모른다. 다 알려진 사실이지만 신상우 총재의 KBO 부임은 노무현 정부의 ‘낙하산 인사’였다. 신 총재는 노 대통령과 같은 부산상고 출신이다. 신 총재는 부임하자마자 “알고 보면 나도 야구인”이라며 “발로 뛰는 총재가 되겠다”고 다짐했다. 2006년 1월 12일 열린 취임식에서 그는 “야구발전을 위해 희생플라이를 치고 싶다”고 말했다.

2년이 지난 지금, 냉정히 신 총재의 ‘플레이’를 분석하면 발보다는 입을 주로 사용했고 희생플라이보다는 늘 홈런을 치는 타자, 삼진을 잡는 투수 역할을 원했음을 알 수 있다. 그 결과는 참담하다. 사상 초유의 프로구단 공중분해가 눈앞의 위기로 닥쳤고 당장 2008시즌을 7개 구단으로 꾸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됐다.

‘발’보다‘입’을 먼저 사용하는 ‘플레이’

신 총재가 그나마 업적으로 내세울 만한 일은 월드베이스볼 클래식 4강에 오른 대표팀의 병역 혜택. 하지만 신 총재는 2006년 봄 일본에서 열린 아시아 예선부터 병역 문제를 끄집어내 병무청을 비롯한 관계자들을 혼란스럽게 했다. 8강이나 4강에 들 경우라는 식의 기준조차 없이, 병무 관계자들의 공감을 얻기도 전에 말부터 꺼낸 것이다.

신 총재는 ‘선언’을 좋아했다. 스스로 언론에 노출하고, 주인공이 되려고 했다가 기대와 다른 평가를 받으면 불평했다. 지난해 농협의 현대 인수가 무산된 뒤 열린 8개 구단 사장 긴급 간담회에서 신 총재는 “정치보다 언론이 더 어렵다”고 불평했다. KT의 프로야구 진출과 관련한 이사회에서도 그는 역시 책임을 언론에 돌리려 했다. 안 되면 언론 탓-어디선가 항상 듣던 소리가 아니던가.

회견, 발표, 선언…, 역동적인 ‘말의 성찬’. 하지만 속내를 살펴보면 진행되고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그야말로 속 빈 강정. 정치인 총재는 떠나면 그만이지만 한국야구가 짊어져야 할 과제는 고스란히 남아 있다.

김성원 JES 기자rough1975@jes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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