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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학창시절을 위하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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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이맘때면 늘 대학교 신입생 시절을 떠올리며 절로 미소를 머금곤 한다. 처음으로 부닥친 대학생활과 객지생활에 모든 것이 서툴렀지만 특히 새롭게 사람 사귀는 일이 힘들었던 것 같다. 다른 누구보다 같이 생활하는 기숙사 동료들과 빨리 가까워질 줄 알았는데 그것도 쉽지 않았다. 우선은 생각을 담는 말부터 달랐다. 그리고 서로 고장을 대표한다는 자부심에 쉽게 속마음을 열지 못했다. 어영부영 중간고사가 끝나고 모처럼 함께하는 술자리가 마련됐다. 대학생활의 첫 관문을 통과한 안도감 때문인지, 아니면 시험결과가 기대에 미치지 못한 실망감 때문인지 마시지도 못하는 술을 겁없이 들이켜댔다. 그러고는 몹시 괴로워하며 하나둘 차례로 숨겨둔 사연을 꺼내놓기 시작했다. 또렷한 기억은 아니지만 술자리가 파할 즈음에 함께 부둥켜안고 울면서 서로 위로했던 것 같다. 그날 이후로 우리는 아주 오래된 친구 이상으로 가까워져 있었다. 밤을 새우면서 카드를 쳤고 사흘이 멀다 하고 술을 마셨다.

그렇게 알게 된 술의 위력은 지금도 여전히 유효한 편이다. 누군가 술자리에 대해 정의하기를 '고통에 동참하는 의식'이라고 했지만 수없이 누군가를 고통에 끌어들이면서, 또 누군가의 고통에 기꺼이 몸을 던지면서 그렇게 많은 사람을 사귀고 또 가까이하고 있다. 그러면서 지금도 술자리가 아닌 다른 방법이 없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보지만 쉽게 답을 찾을 수 없다. 골프를 치라는 사람도 있고 이런저런 모임에 나가라는 사람도 있지만 어느 것 하나 썩 내키지 않는다. 모임 앞에 붙은 거창한 취지가 부담스럽고 골프를 치기에는 시간과 돈이 허락하지 않는다. 그래서 돌이켜보면 한때는 야구를 한답시고 정신이 없었고, 잠시나마 합창을 하는 동아리에 몸담아 열을 낸 적도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사귄 벗들은 지금도 야단스럽지 않게 서로 안부를 묻고 서로를 아쉬워하며 지내고 있다.

아마도 누군가 시켜서 한 일도 아니고 혼자 잘나서 되는 일도 아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오히려 잘난 척 나서서는 곤란한 일이고 서로 마음을 통하고 배려하면서 하나가 되는 즐거움과 그보다 더한 느꺼움이 있었을 것이다. 그때의 추억이 새삼스러워 지금이라도 혹시나 해서 두리번거리고 수소문도 해보지만 주변에서는 좀처럼 찾을 수 없다. 다른 장르보다 특별히 클래식 기타에 관심이 가는 것도 따지고 보면 이런 목마름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싶다. 대학 시절 클래식 기타 동아리 출신이 대부분인 청중은 마치 스스로 무대에 올라 있는 듯 긴장하고 열을 올린다. 연주회 시작 전과 휴식시간은 토론의 열기로 뜨겁고 연주회가 끝나고도 달아오른 분위기는 쉬 가라앉지 않는다. 그래서 밤 늦도록 그들과 어울리면서 기타를 이야기하고 인생을 노래한다.

영화 '브레스드 오프'는 1980년대 영국의 탄광촌을 배경으로 광부들로 구성된 아마추어 브라스밴드의 감동적인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이웃나라 일본은 아마추어 합창단이 너무 많아 정확한 통계조차 불가능하다고 한다. 늦게나마 문화관광부가 새로운 예술정책을 마련하면서 아마추어 예술활동을 장려하고 지원할 모양이다. 때맞춰 아마추어 합창단 '음악이 있는 마을'이 서울에 이어 수원에도 둥지를 틀었다. 3월 6일에는 고려대 아마추어 오케스트라의 연주회가 있다. 지난해에도 그랬지만 올해도 꼭 그 자리에 참석할 생각이고 뒤풀이까지 따라갈 작정이다. 학점과도 무관하고 돈벌이도 아닌 일에 방학을 고스란히 바친 그들의 어리석음에 박수를 보내기 위해서다. 그래서 그들이 얻은 것이 얼마나 큰지를 두 귀로 듣고 두 눈으로 지켜볼 참이다. 그것이 바로 잃어버린 나의 학창시절이기 때문이다.

홍승찬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예술경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