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해는뜨고 해는지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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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3면

제2부 불타는 땅 봄날의 달빛(17) 『귀신이 따로 있어? 이거야 원,머리를 그렇게 풀어 헤치고 있으니 놀랄 수밖에.』 『연지곤지 화장하고,가르마 하얗게 갈라서 동백기름에 머리손질한각시라도 앉아 있을 줄 알았나.』 『꿈인가 생시인가 했네.밤새죽어서 벌써 어디 염라대왕 길목에라두 와 있나 했잖어.그래,너는 좀 괜찮냐?』 대답없이 앉아 있던 화순이 한쪽 팔을 잡은 채 방안을 오락가락하는 종길이에게 말했다.
『사내면 사내다워야지.무슨 남정네가 밤새 그렇게 앓는 소리를내고 그런담.』 『아픈데 무슨 장사 있어.때리문 아픈 거구,마시면 취하는 거구 그렇지.』 『가운데 다리나 떼어놓고 나서 그런 말을 하든가.앓는 소리에 한잠 못 잔 사람한테 미안하다는 말도 없이 무슨 핑계는.』 『처녀가 애를 낳아도 헐말은 있다구안허든가.』 하는 소리라고, 족제비 낯짝을 해 가지고 꼭 제 꼴같은 소리나 하고 있군.그런데 저 인사는 맞은 자국도 없이 얼굴도 말짱한 게,팔만 싸잡고 난리란 말야.
『그래… 아저씨는 어쩐 일로 이 고생이오?』 『태성이란 새끼허구 한 조로 일을 허다가 이꼴 아니여.누무새끼 가면 간다구 귀띔이라도 허든가.말 꼬랑지에 붙은 파리가 천리를 간다구 허지않던가.뭐 들은 소리라두 있으문 그거라도 불어댈 거 아닌가 말여.』 종길이 벽으로 다가가 고개를 발딱 젖히고 드높이 뚫려 있는 창을 올려다 보았다.
『그나저나 이눔들이 도망을 가기는 갔나?』 종길의 두런거리는소리를 들으며 순간 화순의 눈이 빛난다.그럴지도 몰라.이놈을 저들이 첩자로 만들어서 같은 방에 몰아넣고 나한테서 무슨 말이나오나 캐보려고 하는 건지도 몰라.
화순이 능청을 떤다.
『제놈들이 가면 어딜 가겠어.손오공이 놀아 봐야 부처님 손바닥이고,조선놈들 뛰어 봐야 잡혀서 왜놈 밥이지 무슨 수 있겠다구.』 저놈이 첩자일지도 몰라.독방에 처넣었던 자신에게 웬 사내녀석을 함께 집어넣을 때부터 화순은 그런 의심을 하고 있었다.그럴 수밖에 없는 것 가운데 하나가,종길은 얼굴에 거의 맞은자국이 없었기 때문이었다.손가락이 부러지기는 한 모양 이지만 그 정도야 얼마든지 꾸밀 수 있는 일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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