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후남기자의영화?영화!] 충무로 “돈 없다” 아우성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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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돈은 없는 것보다 있는 게 났다지만, 세상 이치가 꼭 그렇지만은 않은 듯 합니다. 영화계를 예로 들어 볼까요.
 
이제는 대세가 된 듯한 ‘한국영화 위기론’이 불거진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2006년이었습니다. ‘왕의 남자’와 ‘괴물’이 연달아 1000만 관객을 돌파하는 대기록을 세운 해였지요. 그해 연초부터 충무로에는 시장 규모에 비해 지나치게 많은 영화가 만들어지고 있다는 우려가 나돌았습니다. 우회상장 붐 등으로 과잉투자·과잉제작이 이뤄진다는 지적이었지요. 결과적으로 2006년 개봉한 한국영화는 모두 108편. 전년의 84편보다 크게 늘어났습니다.

영화는 늘었지만, 흥행에 성공하는 영화는 줄었습니다. ‘30만 클럽’(관객수가 30만 명쯤에 그친 영화)이라는 씁쓸한 신조어도 나왔지요. 적어도 150만∼160만 명은 들어야 수지를 맞추는 상업영화들로서는 참혹한 성적입니다. 한마디로 영화 만들어 돈 벌기가 점점 힘들어진 것이지요.
 
2007년은 기억하시는 대로 사정이 더 나빠졌습니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편수는 줄지 않았습니다. 2007년 11월까지 개봉한 한국영화는 104편. 전년도 같은 기간보다 오히려 좀 늘었습니다. “만들어지지 말았어야 할 영화가 쏟아졌다”는 자학적 표현까지 나돌았습니다. 연초에야, 전년에 이미 제작에 들어가 개봉이 밀린 영화가 많아 그렇다고들 했지만, 요즘 다시 보면 딱히 그 때문만은 아닌 듯합니다.
 
개별 영화제작사들은 여전히 새 영화에 투자를 받는 데 온갖 어려움을 겪습니다만, 영화시장 전체로 보면 새로운 투자자본이 계속 충무로에 입성하는 형국입니다. 통신업계의 공룡기업 KT나 SKT가 대표적이지요. 2년쯤 전 각각 싸이더스F&H·iHQ 같은 기존 영화제작사·매니지먼트사의 지분을 인수한 것을 시작으로, 이제는 본격적으로 영화배급도 맡고 있습니다. 영화관에 필름을 수급하는 일만이 아니라 대개 메인 투자를 겸하는 걸 뜻합니다. 충무로에 한 걸음 더 깊숙이 발을 담그는 격이지요.
 
KT 쪽은 지난해 말에 개봉한 ‘용의주도 미스신’(사진)으로 배급 신고식을 치렀습니다. 영화 속에는 주인공이 광고회사에서 프레젠테이션 하는 장면을 빌려, KT와 관련된 이동통신회사의 실제 상품이 자세히 소개됩니다. 자사 PPL(상품 간접노출)인 셈입니다. 잘 보면, 거듭 노출되는 호텔도 있습니다. 역시 이 영화 제작펀드에 참여한 기업이죠. 그 직후 개봉한 ‘헨젤과 그레텔’은 이에 비하면 귀엽습니다. 영화 속에 나오는 공책에 유명 문구회사의 이름이 적혀 있지요. 역시 충무로에 새로 진입한 제작사입니다.

관객의 가시권에 등장한 경우만 예로 들었습니다만 이 밖에도 새로운 ‘선수’들이 이미 여럿 활동 중입니다. 최근 읽은 책에 “돈이란 항상 넘치거나 부족하다”는 구절이 나오더군요. 가뭄과 홍수가 거듭될수록 농사꾼의 지혜가 절실해 보입니다.

 
이후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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