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달아 높이곰 돋아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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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아리영 아버지는 창가로 가더니,커튼을 열고 마당의 불을 밝혔다. 붙박이 유리 너머,수묵색의 키 큰 나무 한그루가 영상처럼나타났다.
『자귀나무예요.합환목(合歡木)이라고도 하지요.이십년 전 이 집을 지을 때 이곳은 잡목의 산비탈이었지요.대지가 좁아서 다른나무들은 대충 베낼 수밖에 없었는데,집사람은 이 나무만은 베지말자더군요.나무를 살려 집을 ㄷ자로 지었습니다.
아름다운 꽃나무지요.』 초여름에 연지솔 같은 연분홍 꽃을 가득 피운다.마주보는 두개의 빗처럼 섬세한 나무잎은,밤이면 서로가슴을 맞대고 잠자듯 오무라든다.그래서「자구」「자귀」「합환」등의 이름을 얻게 된 것이다.마당에 심으면 내외간의 우의가 두터워진다는, 부적(符籍)과 같은 의미를 부여받은 나무이기도 하다. 『그러나 집사람은 이 집에서 거의 살지 못했어요.내내 해외로만 다니다 갔습니다.』 『따님에게 신라 박혁거세의 왕비 이름을 붙이신 데는 무슨 사연이라도 있으십니까?』 아리영 아버지의기분을 돋우듯 서여사가 물었다.길례도 그것이 궁금했다.
『큰 뜻은 없었습니다.단지 아리영 왕비처럼 아름답고,박혁거세처럼 새 세계를 열어가는 남자의 아내가 되어줬으면 했지요.』 아리영(娥利英)즉 알영(閼英)왕비는 사량리(沙梁里)우물가에 나타난 계룡(鷄龍)의 왼쪽 갈비에서 태어났다.얼굴이 매우 고왔으나 입술이 마치 닭의 부리와 같았는데,월성(月城)북쪽에 있는 냇물에 목욕시켰더니 부리가 떨어졌다.이 일로 인 하여 그 내를발천(撥川)이라 부르게 됐다고,『삼국유사』는 적고 있다.
이것은,알영이 쇠부리꾼 즉 고대 야장(冶匠)의 딸임을 일러주는 대목이다.
「닭 부리」란 말이 키 워드다.
닭은 새다.「닭 부리」는 곧「새 부리」「쇠 부리」와 소리가 통한다.고대에「쇠」는「사」「새」「소」「쇠」등으로도 발음됐다.「새 부리」는 바로「쇠 부리」를 의미했던 것이다.
당시의 첨단무기인 무쇠 살촉이나 칼,또는 무쇠 농기구를 만들어내는 제철기술은 권력의 원천이었다.박혁거세는 알영의 소속집단인 쇠부리의 도움으로 비로소 나라를 세울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길례의 아버지도 그 쇠부리꾼의 후예다.아버지만이 아니라 길례 어머니도 쇠부리꾼의 딸이었다.영특하고 바지런하여 가난한 살림도 잘 꾸려갔는데,한해를 앓아눕더니 신이 내려 무당이 되었다. 굿판에서 춤을 추던 어머니 모습을 길례는 지금도 선명히 기억한다.앓아누워있던 어머니와는 영 딴판으로,당당하고 신명이 넘쳐흘렀다.춤추며 황홀해 하던 그 눈빛.
그러다 가출했다.길례가 아홉살 났을 때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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