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청와대비서실>210.전두환 前대통령 연희동복귀 홀로서기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8면

전두환(全斗煥)前대통령이 국회증언을 마치고 어둠을 달려 해가 바뀐 다음날인 90년 1월1일 새벽 다시 돌아오기까지 백담사에남은 이순자(李順子)여사등 가족들은 법당에서 3천배(拜)를 올리고 있었다.가장(家長) 全전대통령의 무사귀환과 함께 이들이 기원한 것은「하산(下山)」이었다.
그것도 정확히 말하면 그냥 하산이 아니라 「연희동집으로의 복귀」였다.연희동 집으로의 귀가는 단순히 불편한 산사생활을 청산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무엇보다 중요한 명예를 회복한다는 상징적의미가 있었다.
全전대통령이 백담사로 칩거하러 가면서 내놓은 것은 연희동 집으로 대표되는 사유재산과 정치자금 1백39억원,그리고 대(對)국민 사과였다.이중 정치자금과 대국민 사과는 법적 차원에서 따질 문제가 아니었다.정치자금은 정치적 차원,대국민 사과는 도덕적 차원으로 해결할 수밖에 없었다는 뜻이다.다시말해(全전대통령의 입장에서 생각해볼 때)정치자금은 퇴임후 국가원로 자문회의 의장으로서 사용할 공적 용도의 돈이기에 그 자체가 범법은 아니며 대국민 사과는 전직 대통령으로서 자신의 친인척이나 부하들이저지른 비리.범죄에 대해 도의적 책임을 통감한다는 것이지,본인이 직접 범법행위를 저질렀다는 얘기가 아니다.
러나 연희동 집으로 대표되는 사유재산은 의미가 다르다.물론 소유권을 빼앗기지는 않았지만 집을 떠나 있다는 것 자체가「사유재산권을 행사하지 못하는 법적 제재」라는 멍에와 같다고 느끼고있었던 것이다.
6共 청와대 관계자 W씨는『全전대통령도 내심「연희동 집으로 돌아갈 경우 또 시위가 재발하지 않을까」하는 6共의 우려에 공감하는 바가 적지않았죠.하지만 全전대통령은 6共청와대가 연희동집을(정치자금처럼)「국가에 헌납했다」고 언론플레이 해 부정축재한 것처럼 보이게 했다는 강한 불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그래서「부정축재가 아니다」는 명예회복 차원에서 연희동 복귀에 강한 집착을 보였습니다』라고 기억했다.
그러나 연희동 집으로 돌아 가고자 하는 기원은 쉽게 이뤄지지않았다. 국회 증언전만 해도 6共 청와대는 국회증언만 해주면 뭐든지 다 들어줄 것처럼 다급했다.그러나 6共 청와대는 하산문제에 대해서만은 곤란해 했다.『여론이 좋지않으니 조금만 더 기다려달라』고 달래다가 백담사측에서 시한을 요구하자『한달 내로 모시겠다』고 약속하기까지 했다.
그래서 증언 직후에는 하산이 임박했다는 기대감에 백담사와 청와대의 관계가 좋았다.새해 첫날인 1월1일 盧대통령이 직접 전화를 걸어와 감사를 표한데 이어 全전대통령의 생일을 맞아 하루전인 1월17일에는 정구영(鄭銶永)민정수석을 보내 생일을 축하하기도 했다.
그러던중 1월22일 3당 합당이 발표됐다.온 국민을 충격에 빠뜨린 대사건이기도 했지만 특히 백담사는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5共측 관계자 X씨는『민정당은 누가 만든 당입니까.全전대통령이죠.또 盧대통령을 만들어 낸 당은 어딥니까.바로 민정당입니다.민정당이란 全전대통령의 당인 동시에 盧대통령의 당이고,이는 全전대통령이 그렇게 귀중하게 생각하는 평화적 정권 교체를이룬 당 아닙니까.그런 민정당을 없애버린 3당 통합을 지켜보는全전대통령의 심경이 오죽했겠습니까』라고 설명했다.3당 통합은 민정당이란 끈으로 이어진 5共과 6共의 연(緣)을 끊는 마지막쐐기였던 것이다.
3당 합당의 악영향(?)은 곧바로 나타났다.『한달 내로 모시겠다』던 청와대는 백담사에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하산에의기대는「홀로서기」라는 비장한 결심으로 바뀌어 갔다.「더이상 6共 청와대에 기대를 걸지않겠다」,즉 스스로의 힘 으로 연희동 집으로 돌아가겠다는 얘기였다.
정치적 문제는 정치로 풀어야 한다.백담사에서 택한 정치는 장외정치,산사의 대중강연이었다.눈에 갇힌 지루한 겨울이 지나고 봄이 되면서부터 백담사를 찾는 행렬이 하루가 다르게 늘어갔다.
백담사측은 꼬리무는 참배행렬을 상대로 장외정치를 본격화했다.
처음에는 법당에서 간단한 인사말만 했다.그러나 사람이 늘어나면서 쉴 공간이 필요했다.일단 이들을 수용하기 위해 대웅전옆 빈공간에 비닐로 임시막사를 만들었다.한번에 2백~ 3백명을 수용할 수 있는 규모였다.법당에서 하던 인사말이 길어지면서 연설이됐고 비닐막사는 연설을 들은 청중,대기하는 청중들의 쉼터로 활용됐다.그러다 나중에는 비닐막사를 연설회장으로 바꿔 마이크 시설까지 했다.여름이 돼 관광객이 본 격적으로 몰려들기 시작하자아예 버스 20여대를 동원해 용대리 입구에서부터 사람을 태워날랐다.아침부터 시작해 한번에 2백~3백명씩 하루 10여차례 연설을 했으니 매일 3천여명이 그의 불우한 처지를 동정하고 돌아가는 셈이었다.
「법문」(法問.불법에 대한 문답)이라고는 하지만 입담 좋은 全전대통령이 매일 수천명을 상대로 강연한다는 사실은 6共 청와대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래서 청와대에서는 은근히 강연중지를 요청하기도 했다.당시 백담사 창구였던 정구영 민정수석이 백담사를 찾아『강연같은 것은좀 안하시는게 좋지않겠습니까.괜히 얘기 많이 하시면 좋은 얘기라도 외부에 알려지면서 확대 해석돼 전.현직 대 통령이 같이 명예를 실추당합니다』라며 직접 강연중단을 요청하기도 했다.그러나 일단 홀로서기를 결심한 백담사,다른 수단이 없는 백담사에서유일한 자구책을 포기할 리 없었다.
결국 문제가 풀리기 시작한 것은 연말,새로운 창구가 개설되면서 부터였다.새 창구는 12월6일 정구영수석에 이어 취임한 김영일(金榮馹) 민정수석이었다.金수석은 기존 창구와 달리 청와대와 백담사간의「직접화법」을 시도했다.
金수석이 민정수석에 취임하자마자 만난 백담사 사람은 기존의 창구와 전혀 다른 全전대통령의 장남 재국(宰國)씨였다.재국씨는미국유학에서 돌아와 백담사의 핵심측근 역할을 하고 있었다.전통적인 가풍을 자랑하는 全전대통령은 다른 어떤 아 버지 못지않게아들,특히 장남을 믿고 아꼈다.아버지를 닮아 정치적 감각과 뚝심이 있는 재국씨 역시 참모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해냈다.백담사의 한 측근이『全.盧대통령간의 문제에는 가족만이 알수 있는 감정적인 측면이 적지않다』고 말할 정 도로「가족」과「감정」은 중요한 변수였으며 혈육인 그는 다른 어떤 측근도 말할 수 없는 감정적인 문제까지 대변할 수 있었다.
***金 수석은 시내 호텔에서 재국씨를 만나 장시간에 걸쳐 백담사의 심경을 들었다.金수석은 5共시절부터 청와대에 근무하면서 全전대통령의 두터운 신임을 얻었을 뿐 아니라 재국씨와도 잘알고지내온 터라 가슴속 깊이 얽힌 감정의 밑바닥까지 들을수 있었다. 金수석은 민감한 사안인만큼「직접화법」을 구사하기로 하고재국씨의 얘기를 메모했다.그리고『그대로 전하겠다』고 약속하고는실제로 盧대통령 부부가 함께 한 자리에서 직접화법으로 백담사의얘기를 전달했다.「가족」과「감정」의 문제가 중요한 부분이었기에대통령과 영부인이 모두 들어야 효과적이라고 생각했던 것이었다.
金수석은 『盧대통령 내외는 보고를 받으면서 많이 놀라더군요.
그동안 참모들이 盧대통령이 듣기 싫어할 만한 얘기는 안했던 거죠.어떤 부분에서는 순수한 의도를 설명하기도 하고,또 억울하다는 부분에서는 변명을 하기도 했죠』라고 기억했다.
그만큼 그동안 청와대와 백담사간에는 남모를 감정과 오해가 쌓여있었던 것이다.「전화를 누가 먼저 받느냐」「호칭을 어떻게 하느냐」는 사소한 인간관계에서부터 친인척들에 대한 인신구속과정에서 보인 盧대통령의 소극적 태도에 이르기까지 세세한 감정에서 촉발된 것이 많았다.
金수석은 다시 재국씨를 만나 盧대통령 내외의 반응과 설명을 다시「직접화법」으로 전했다.그렇게 대화는 한단계 깊은 차원에서오갔다.마침내 1주일만인 12월13일 盧대통령은 소련(蘇聯)방문길에 오르면서「연내 하산」을 지시했다.
당시까지도 청와대쪽에서는 백담사측에 『연희동 집외에 어디든 말만 하라.모든 편의를 다 제공하겠다』고 제안했다.「연희동 집만은 곤란하다」는 이유는『이미 헌납한 것으로 인식돼 있는 연희동 집으로 다시 돌아가면 국민여론이 다시 나빠진다 』는 것이었다.실제로 당시 야당이나 언론에서는 연희동 집이 여전히 全전대통령 소유로 돼있다는 사실을 문제삼곤 했었다.
청와대에서 타협안으로 마련한 거처는 두 곳이었다.제1후보는 서울밖인 과천의 별장으로 육사 11기 동기생인 정우개발 민석원(閔錫元)회장 소유.1천5백여평의 넓은 대지에 풀장까지 갖춘 저택이었다.제2후보는 서울시내인 강남의 某 쌍둥이 가옥으로 한채는 全전대통령이 거처하고 다른 한 채는 경호원들이 거처할 수있어 조건이 맞는 셈이었다.
폭설이 내린 12월27일 오전 마지막으로 金수석이 직접 全전대통령의 육성을 직접화법으로 녹취하기 위해 백담사를 찾았다.
***아 침나절 이른 시간에 헬기로 백담사에 도착한 金수석은요사채를 찾아 인사했다.全전대통령은『金수석,이리오시오』라며 그를 안방격인 옆방으로 끌었다.全전대통령의 얘기는 끝이 없어 동치미에 냉면을 말아 점심을 대신하고서도 계속됐다.
金수석은 『각하,제가 적어야겠습니다.잠깐만 기다려 주십시오』『정확히 하기 위해 다시 한번 말씀해 주십시오』라면서 메모했다.대학노트 4권 가량의 분량이었다.
全전대통령은 金수석의 창구역할에 만족한 듯『내가 청와대 있을때 잘해준 것도 없는데 당신이 고생이 많다』고 치하한 뒤『소원을 한가지 말해봐라.내가 할수 있는 것이면 들어주겠다』고 말했다.金수석은『하산해 주십시오』라며 업무상의 소원을 말했다.
그러나 全전대통령은「무조건 연희동 집으로의 복귀」를 고수했다.자신의 자존심과 명예가 걸린 집이기에 아무리 훌륭한 집도 필요없다는 것이었다.결국 全전대통령의 본심을 직접화법으로 들은 盧대통령은 연희동 복귀를 허용,12월30일 하산하 게 된다.
하산도 작전이어서 시위나 돌발사태에 대비해 홍천. 양평에 헬기를 대기시켰고,연도에는 경호요원을 집중배치했으나 불상사는 없었다.오히려 연희동 집 입구에는 서의현(徐義玄)총무원장과 불교여신도등 수백명이 환영한다고 북적거렸다.
연희동 집에 들어선 全전대통령은 대기중이던 金수석에게 한마디했다. 『어이 金수석,아무 일 없잖아.』 (5共측 해석에 따르면)연희동 복귀는 백담사 장외투쟁의 승리였기에 全전대통령은 개선장군이었다.개선장군은 盧대통령이 직접 자신을 맞아주길 기대했다.그러나 盧대통령은 나타나지 않았다.
〈吳炳祥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