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 “출세하려면 발로 뛰어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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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2면

지난해 말 우리은행 본점 기업영업본부장에서 승진한 이공희(55) 부행장은 ‘영업의 전설’로 통한다. 강경상고를 졸업하고 1970년 12월 옛 상업은행에 들어간 이 부행장은 37년 직장생활의 거의 전부를 영업 부문에서 지냈다. 은행 지점에서부터 본점 영업본부까지 그의 이력서에는 ‘영업’이란 단어가 거의 빠지지 않는다. 지난해 상반기 평가 1위, 수출입 환전 실적 1위, 신용카드 프로모션 1위 등 은행 내 각종 영업 행사에서 1위를 차지했다.

이 부행장은 “다른 특별한 노하우는 없다”면서도 “차장(92년) 때 관리하던 고객을 지금도 관리하니까 이 고객들이 많은 도움을 준다”고 말했다.

그가 현재 관리하는 고객은 개인·법인을 합쳐 1000명에 달한다. 그는 이들과 수시로 만나고 경조사도 꼭 참석한다고 한다. 은행에 ‘영업통’ 전성시대가 왔다. 예전 같으면 재무·인사·경영 같은 기획부서 출신이 우대를 받았지만 이제는 영업통이 대부분의 요직을 차지하고 있을 정도다. 지난해 말 박해춘 우리은행장이 부행장·단장급 인사를 하자 우리은행은 술렁거렸다. 부행장·단장으로 승진한 9명 모두가 영업통이었기 때문이다. 예전 같으면 기획부서 출신이 3~4명 포함됐으나 이번 인사에서는 한 명도 없었다.

박 행장은 “2008년 영업환경이 더욱 어려워지리라 예상돼 영업력이 탁월한 영업본부장과 지점장을 발탁했다”고 말했다. 이번 인사로 우리은행 부행장·단장급 임원 22명 중 3명만 비영업(기획) 출신이 차지하게 됐다. 박 행장 취임 전까지만 해도 임원급 19명 중 7명이 기획 출신이었다.

국민은행도 지난해 말 부행장급 인사를 하면서 영업통을 중용했다. 6명 중 전략·HR·전산 등을 뺀 3명이 영업본부장 출신이다.

이번에 새로 선임된 오병건(55) 여신그룹 부행장은 영업에만 몸담은 영업통이다. 요즘 국민은행에서 전략·인사를 담당하는 간부도 지점에서 영업 실적이 탁월해야 본점 부장·본부장급으로 발탁된다. 이 때문에 국민은행 내에서는 ‘돈을 벌어와야(영업을 해야)’ 승진할 수 있다는 말이 나돌 정도다.

지난해 말 신한은행의 수원·과천·안양 지역본부장에 임명된 윤용진(53) 본부장은 요즘 사무실 짐을 싸고 있다. 은행이 지난해까지만 해도 본점에 있던 24개 지역본부장 사무실을 해당 지역으로 옮기기로 했기 때문이다.

윤 본부장은 “영업력을 향상시키기 위해 지역본부장이 현장에서 효율적으로 영업을 지휘하되 지역본부장의 권한을 강화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신한은행 관계자는 “예전엔 인사 때 기획 쪽을 선호하는 직원들이 많았지만, 이제는 무조건 영업 쪽”이라며 “영업을 안 시켜주면 직장을 옮기겠다는 직원도 많다”고 말했다.

 
김창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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