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 '제 12회 삼성화재배 세계바둑오픈' 엷음의 정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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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제 12회 삼성화재배 세계바둑오픈'

<4강전 2국 하이라이트>

○·박영훈 9단(한국) ●·구리 9단(중국)

장면도(22~30)=박영훈 9단은 훗날 말했다. “1국을 진 뒤 글렀구나 싶었습니다. 어차피 진다면 좋은 기보라도 남겨야겠다고 생각했지요.”

 예전엔 승부보다 작품을 우선으로 하는 기도 정신을 수업의 첫째로 쳤다. 현대에 와서 기도 정신은 박물관으로 가버렸지만 프로들은 마음을 비워야 할 때 종종 ‘작품’에 대해 생각하곤 한다. 패배의 쓴잔 앞에서도 좋은 기보는 커다란 위안이 되는 것이다.

 22로 끼운 수는 포석에서 중반으로 돌입하는 첫수. 그러나 이게 ‘좋은 기보 만들기’의 첫수가 될 수 있을지는 아직 미지수다. 23은 절대인데 다음이 어렵다. 백의 주문은 ‘참고도1’ 흑1로 잡아주는 것이고 그 경우 백4까지(4는 A로 물러설 수도 있다고 한다) 백은 시원하고 흑은 옹색해진다.

 하나 구리 9단은 역시 강했다. 25로 밀어 백의 의표를 날카롭게 비틀고 나온 것이다. 그렇더라도 30으로 뻗는 자세가 하도 시원하여 이것으로 백이 좋지 않을까 싶기도 했다.

 가령 ‘참고도2’ 흑1로 뻗어 5까지 두어온다면 백도 B나 C를 차지하여 충분하다. 그러나 구리는 31로 헤딩해 왔고 이 수가 떨어지자 모두들 나지막하게 탄식하며 좋은 수라는데 동의한다. 백의 모양은 어딘지 엷었다. 그게 어딘지 쉽게 눈에 띄지 않았는데 31이라는 급소 일격이 엷음의 정체를 확연히 드러내 주고 있었다. 백의 응수가 궁해졌다.

박치문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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