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거기 그녀가 서있는걸 보았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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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3면

몇 년만의 가뭄이라고 난리더니 내가 길에 나서니까 연일 비가뿌렸다.나는 목포행 기차표가 없다는 소리를 듣고 시외버스를 갈아타가면서 구례에까지 가볼 생각이었다.
어떤 소설의 주인공이 하던 말이 생각났다.
「목적지만 있다면 그때부터는 방황이 아닌 거지요.」 나는 지도를 펴들고 구례와 가까워지는 쪽이면 무조건 그 버스를 집어탔다.그리고 어떤 날은 일부러 하루종일 걷기도 했다.걷다가 지치면 산기슭에 누워 하늘을 보면서 멍하니 머리를 비워두고 있고 싶어했다.
이게 뭔가… 아 푸르른 내 스무살… 그런 생각을 하다 보면 어쩐지 울고 싶어지기도 하고 그러는 거였다.써니는 도대체 어디에 가 있는 걸까.하영이는 어떻게 변했을까.상원이는 왜 대학에꼭 가려고 그럴까.용호도의 소라는 심심하지 않을 까.희수도 유럽의 어딘가를 떠돌며 나처럼 답답해하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걷고 또 걸었다.지칠 때까지 걸었고 때로는 기운이 남아 있는것 같아서 뛰어보기도 하였다.비에 젖었다가 땀에 젖었다가 다시해가 들면 옷과 머리가 어느새 말라 있고는 하였다.
구례의 천일암에 이른 것은 내가 서울을 떠난 지 나흘 만이었다.산에도 사람들투성이였다.천일암에도 십여 명이 암벽을 타고 오르는 중이었다.나는 등반을 포기하였다.장비도 부실했고 기운이벅찬 것도 사실이었지만,무엇보다도 그 사람들 틈 에 섞여서 천일암을 오르고 싶지는 않았다.윤찬이 오르지 못한 암벽을 오른다는 건 이제 아무 의미가 없었다.
나는 성적표와 함께 날아들었던 소라의 엽서를 청바지 뒷주머니에서 꺼내서 펴들었다.그 엽서는 반으로 접혀 있었고 만년필 글씨 가운데 몇몇은 물에 젖어서 잉크가 번져 있었다.
「나는 어쩌면 요술쟁이의 딸 바다만큼의 요란한 비밀을 품고 떠오르는 하늘을 물끄러미 쳐다본다」.
그 아래 용호도로 가는 길이 자세히 적혀 있었다.먹여주고 재워준다는 말이 나를 혼자 웃게 만들었다.
나는 용호도에서 이틀을 머물렀다.소라의 외할아버지는 국민학교교장선생님을 하다가 은퇴해서 그 섬에 눌러 살고 있는 거라고 했는데 그야말로 나를 자상하게 보살펴주셨다.내가 거기에 머문 이틀은 장마가 한참 극성을 부릴 때여서 소라와 나는 주로 처마에 앉아서 지냈다.
『여기 와 있으니까 모든 게 너무나 단순해졌어.』 소라가 같은 말을 두 번 했다.빗소리에 가려서 말소리가 내게 잘 들리지않았던 거였다.
『그렇다면 엄청난 걸 얻은 거지.』 나도 두 번이나 같은 말을 해야 했다.빗소리의 크기를 잘못 짐작했던 거였다.소라가 대견하다는 듯이 웃다가 큰 소리로 말했다.
『어떻게 알았어.그 어려운 걸.』 나도 웃기만 하였다.나는 구례에 다녀온 이야기를 할까 하다가 그만두었다.소라가 나를 이해해주지 못하면 몹시 외로워질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내가 용호도를 떠나던 날은 하늘이 맑게 개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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