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7 사교육대책 성공하려면] 中. 전성은 교육혁신위원장 특별기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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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수준별 학습은 단순한 사교육비 경감 방안이 아니다. 학습 방식의 꽃이다. 진작 했어야 하는데 때늦은 감이 있다.

경남 거창고와 샛별중에서는 일찍이 수준별 수업을 해왔다. 그 역사가 50년은 된다.

수학과 영어를 대체로 A.B.C반으로 나누어 수업했다. 나는 항상 C반의 영어를 가르쳤다. 수준이 낮은 아이들을 가르치다 보면 자연히 수업 방법이 개발된다.

제자 중 공부는 잘 못하지만 성실한 학생이 있었다. 그런데 be 동사가 들어가는 아주 간단한 문장을 해석하지 못하고 쩔쩔맸다. 그래서 물었다.

"is의 뜻이 뭐지?"

"'눈'입니다."

"뭐라고?"

내 목소리가 높아졌다.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다시 대답했다.

"눈이요."

내 목소리가 한 옥타브 더 올라갔다.

"야, 이놈아. 눈은 snow잖아?" 몇번을 반복한 끝에 나는 드디어 알아챘다. 그 학생은 '는'이라고 말한 것이었다.

"He is a boy." 하면 "그'는' 소년이다"라고 해석한 것이다. 그래서 기본 문장을 익히게 한 다음 수식어가 붙는 북잡한 문장을 가르치는 등 열(熱)과 성(誠)을 다했다.

He is a boy. He is a little boy. He is a little Indian boy….

그리고 그 아이들을 오전 6시에 모아서 한 시간씩 가르쳤다. 출장을 가게 되면 저녁 시간에 모았다.

실력 향상은 수업시간 수와 비례하기 때문이다. 못하는 아이들을 더 많이 가르치지 않고 잘하는 아이들과 똑같은 시간 수로 가르치면 실력 차이가 줄어들 턱이 없다.

지금도 거창고 도재원 교장은 2학년 학생들 가운데 수학 성적이 떨어지는 학생 40명을 모아 화.목요일 저녁 특별지도를 한다. 교장이 직접 성적이 낮은 아이들을 챙겨서 더 가르쳐 주는 것이다.

이렇게 학교 교장부터 선생님까지 학교 전체가 성적 수준이 낮은 학생들을 먼저 배려해야만 수준별 수업은 그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 젊은 교사들 가운데 큰 악의는 없지만 수준이 낮은 반에서 수업을 하다가 무심코 "공부도 못하는 놈들이…"하는 식의 말을 하는 경우가 있다. 그런 말은 치명적이다.

거창고를 나온 40대의 졸업생은 이렇게 말했다. "수준별 수업을 제대로 하면 특목고가 필요 없습니다."

수준별 수업은 학생을 인격으로 나눈 것이 아니라 특정 과목에 대한 학업 성취도에 따라 나눈 것이다. 거창고에서의 경험을 토대로 하면 잘하는 A반에서 B반으로 가겠다고 하는 학생은 많이 나오지만 B반에서 A반으로 올라가겠다고 하는 학생은 많지 않다.

이처럼 수준 낮은 학생들에 대한 애정과 열정이 차고 넘치면 수준별 수업은 교육의 꽃이 될 수 있다. 반대로 소위 일류대학 입학률을 높이겠다는 발상에서 수준별 수업을 하게 되면 오히려 학교 교육의 암이 된다.

수준별 수업은 한 학년 학급 수가 4개일 때 가장 실시하기가 좋다. 교사 정원과 교실 이동 등 여러 가지 사항으로 보아 그렇다. 너무 큰 학교에서는 여러 가지 고민을 해야 한다.

때늦은 감이 없지 않다. 하지만 수준별 수업이 현장에 정착돼 교실 수업이 살아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대통령 직속 교육혁신위원회 위원장, 전 거창고.샛별중 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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