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년 전과 전혀 다른 미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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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사진)은 20일 오전(현지시간) 이명박 대통령 당선자에게 축하전화를 걸었다. 톰 케이시 국무부 부대변인도 19일 선거 결과가 나오자마자 "이명박 당선자의 승리를 축하한다"며 "우리는 이 당선자와의 협력을 고대한다"고 말했다.

미 행정부는 내년 1월 초 국무부.국방부.상무부 등의 관리로 구성된 대표단을 한국에 파견해 이 당선자 측과 주요 현안을 논의할 것이라고 워싱턴의 한 외교소식통은 밝혔다.

스탠퍼드대 아태연구소와 코리아 소사이어티도 2월 초 윌리엄 페리 전 국방장관 등 한반도 전문가들을 한국에 보내 이 당선자와의 대화를 추진하고 있다. 미 행정부가 한국의 대통령 당선자에게 축하인사를 하고 협력을 희망한 것은 5년 전과 똑같다. 당시 애리 플라이셔 백악관 대변인은 성명에서 "노무현 후보의 당선을 축하하며 긴밀히 협력하길 고대한다"고 말했다. 대선 다음날 부시 대통령은 노 당선자에게 축하전화를 걸어 이른 시일 내 미국을 방문해 달라고 말했다. 하지만 이런 공식 반응과 달리 미 행정부 내부 분위기는 5년 전과 많이 다르다. 2002년 12월에는 미 행정부가 한국 대선 결과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선거일까지 박빙의 레이스가 전개됐기 때문이다. 그러다 미국을 한 번도 방문한 적이 없고, 한국의 자주를 강조했던 노 후보가 승리하자 내심 긴장했다. "한국의 차세대 지도자가 대미 관계를 다시 설정하려 할지 모른다"는 우려가 선거 전 제임스 켈리 당시 국무부 동아태 차관보 입에서 나올 정도였다.

그러나 이번엔 달랐다. 미국은 한국 선거를 유심히 지켜봤지만 언행은 아주 조심했다.

미국이 2002년 대선 직전 주한미군 장갑차에 치여 숨진 효순.미선양 사건을 잘못 다루는 바람에 반미감정이 폭발했고, 그게 미국에 불리한 선거 결과로 나타난 걸 염두에 뒀기 때문이다. 이번엔 5년 전의 켈리처럼 한국 대선에 대해 공개적으로 언급한 미국 관리는 없었다.

미국은 또 마음을 졸이면서 선거 결과를 기다리지 않았다. 이명박 후보의 압승은 일찌감치 예상됐다.

한.미 동맹을 강조해 온 이 후보의 성향도 잘 알고 있었다. 주미 한국 대사관 관계자는 "5년 전엔 노무현 당선자가 대미 관계를 어떻게 정립할지 전화로 물어보는 미국 관리들이 많았다고 하는데 이번엔 전화 한 통 받지 못했다"고 말했다.

5년 전과 또 다른 모습은 미국이 이 당선자 측과 말 그대로 긴밀하게 협력하려 한다는 점이다. 노무현 당선자는 부시 대통령의 조속한 방미 요청을 수락했지만 취임 전 방문은 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당선자 시절 벌써 "미국이 요구하는 질서에는 일방주의적인 것도 있다"거나 "북한을 범죄자 취급해서는 안 된다"고 하는 등 자극적인 말을 했다.

미국이 내년 1월 초 행정부 대표단을 서울에 파견하는 건 5년 전과 달리 미리 한국의 새 정부 측과 대화와 협력 통로를 구축하겠다는 의도로 분석된다. 스탠퍼드대 연구소 등 민간 연구기관이 이 당선자 측과 접촉하려는 것도 상호 이해의 폭을 넓히려는 의도에서다.

워싱턴=이상일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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