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칼럼>13.관철동시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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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3면

86년,국내에선 두가지 사건이 있었다.20세의 유창혁(劉昌赫)3단이 조훈현(曺薰鉉)9단과의 「신풍대결」에서 3전3승했다.
신인 출현을 갈망하던 사람들은 속으로 부르짖었다.
『유창혁,바로 너였구나.』 86년10월 11세의 이창호(李昌鎬)가 조용히 프로의 관문을 뚫었다.아직은 어린애였으므로 반향은 작았다.
그러나 격동하는 세계 바둑계에서 유창혁.이창호의 등장따위는 소소한 에피소드였다.86년 세계 바둑계의 가장 충격적인 사건은첫째가 조치훈(趙治勳)9단의 몰락이었고,둘째가 베이징(北京)의반달곰 녜웨이핑(섭衛平)9단의 비상이었다.
4천여년 바둑역사상 시대를 초월한 최강자는 누구일까.이 질문에 일본은 항시 막부 초기의 최고수요,근대이론의 창시자인 기성(棋聖)도샤쿠(道策)를 꼽았고 그 다음으로 흑번필승(黑番必勝)의 신화를 남긴 혼인보(本因坊)슈사쿠(秀策)와 살 아있는 기성우칭위안(吳淸源)9단을 꼽았었다.이것이 도샤쿠.조치훈 순으로 바뀌더니 드디어 『조치훈이 최강이다』쪽으로 기울었다.그러나 趙9단은 84년 린하이펑(林海峰)9단에게 혼인보타이틀을 내주고 85년 숙적 고바야시(小林光一)9단에 게 명인(名人)을 빼앗겼다.86년 교통사고로 중상을 입은 趙9단은 랭킹1위 기성(棋聖)전에서 고바야시의 도전을 받았다.趙9단은 휠체어에 앉아 비장하게 맞섰으나 처참하게 무너졌다.『목숨을 걸고 둔다』는 그의 자세는 사람들의 심금을 울 렸으나 趙9단은 끝내 무관으로 전락했고 곧 실의에 빠졌다.
이제 일본의 1인자는 고바야시였다.다케미야등 趙9단과 친한 선배들은 가끔 한밤중에 조치훈의 술에 젖은 목소리를 들어야 했다. 기타니(木谷)문하생 시절부터 같이 커온 조치훈과 네살 위의 고바야시.고바야시는 스승 기타니9단의 딸인 13년 연상의 레이코(木谷禮子)8단과 결혼했고 조치훈은 도장에서 돌봐주던 여섯살 연상의 여인과 결혼했다.
아무튼 趙9단은 한번도 뒤진 적이 없는 고바야시에게 정상의 자리를 빼앗겼고 이때부터 8년간의 침잠 속에서 스스로를 혹독하게 갈고 닦아 인간적으로 성숙하게 된다.
중국의 녜웨이핑9단은 86년 일약 세계의 스타가 됐다.문화혁명기간(66~74년)중 반동분자의 아들로 지목받아 헤이룽장성(黑龍江省)의 농장에서 돼지우리 당번으로 지냈던 34세의 녜웨이핑은 「中日슈퍼대결」에서 돌연히 세계 최강자로 떠 올랐다.85년의 1회대회에서 중국팀의 마지막 주자로 나가 가토(加藤正夫).고바야시.후지사와(藤澤秀行)를 연파하고 우승하더니 86년엔 역시 마지막에 다케미야등 일본대표 5명을 쓸어버리고 또다시 우승했다. 그가 베이징에 돌아갔을 때 공항엔 장관들이 나와 영접했다.이때부터 별명은 「철의 수문장」이 됐고 국민적 영웅으로 떠오른 녜웨이핑에게 중국정부는 기성 칭호를 수여했다.
한국의 조훈현은 중국과 일본이 벌이는 화려한 잔치를 우울한 얼굴로 멀리서 구경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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