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칼럼>관철동시대 12.9살소년 이창호 飛上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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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3면

체구는 뚱뚱하고 피부색은 약간 검고 눈은 졸린듯 멍하다.뭘 물으면 눈을 아래로 깔고 모기소리로 달싹인다.조훈현(曺薰鉉)9단은 그 소년을 바라보며 수수께끼 같은 호기심을 느꼈다.
84년 봄,曺9단은 전국어린이대회에서 우승했다는 국민학교 3학년짜리 소년과 두점으로 시험기를 두고 있었다.바둑은 강했다.
승부는 曺9단이 이겼지만 늑골을 파고드는 듯한 인상적인 힘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모호했다.창호를 선뜻 내제자로 받아들일 때 어떤 영감이 뇌리를 스쳤지만 그 후에도 많은 것들이 계속 안개 속에 싸여 있었다.
曺9단이 아는 기재(棋才)는 이렇지 않았다.우칭위안(吳淸源)9단은 단아한 외모에 목소리가 낭랑하고 자세가 강렬했다.사카다(坂田榮男)9단은 칼같은 눈빛으로 내면의 뜨거움을 전류처럼 토해냈다.누구도 몽롱하지는 않았다.게다가 저 실력에 가끔 복기(復棋)가 틀리지 않는가.적어도 그는 이 아홉살짜리 소년이 머지않아 자신의 아성을 유린하는 최강의 적수가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다.
84년 가을,일반인 입단대회에 시험삼아 출전한 이창호는 본선리그에서 첫판부터 내리 5연패했다.「조훈현의 내제자」란 사실에호기심을 갖고 주시했던 아마강자들의 입가에 피식 미소가 감돌았다.그러나 이창호는 이 다음부터 괴력을 발휘,내 리 6연승해 모두의 입가에서 미소가 사라지게 만들었다.
이창호는 출발부터 불가사의했다.굉장한 노력가였고 승부가 끈질겼다.발랄하고 산만한 천재들의 어린시절과는 거리가 멀었다.마치인생역정을 무수히 겪어본 장년의 승부사처럼 꽉 자리를 차고 앉아 어둡고 괴이하지만 줄기찬 승부호흡을 토해내고 있었다.
눈만 끔뻑이는 이창호는 대우(大愚)의 풍모를 보여주고 있다기엔 너무 어렸다.훗날 한가닥 의문이 풀렸다.창호의 두번째 스승이었던 전영선(田永善)6단이 술을 한잔 걸치고 와 이렇게 말했다. 『어렸을 때 시훈이는 밥상의 반찬이 떨어질까봐 안으로 모으고 창호는 마구 밀어냈다.』 시훈이란 지금 일본에서 린하이펑(林海峯)9단과 천원(天元)전 도전기를 두는 유시훈(柳時壎)6단을 말한다.柳6단의 바둑은 격렬하고 공격적이다.이창호는 반대다. 『창호는 격렬한 아이야.5세땐 뭘 사주지 않는다고 쇼윈도로 그대로 돌진해서 엉망으로 꿰맨 적도 있어.』한국기원의 기인이라는 田6단의 회고가 이어진다.『생각보다는 굉장한 다혈질이지.잘보라고,얼굴이 검어서 그렇지 한번 붉어지면 30분쯤 가잖아.』 이창호는 지하에 용암을 품고 있다는 얘기였다.그 용암을 선천적인 내공으로 꽉 누르고 있어 눈에 띄지 않을 뿐『무섭고 격렬한 아이』라고 田6단은 기자실이 떠나갈듯 외쳤다.86년 8월 잠룡 이창호가 드디어 프로 세계의 관문을 뚫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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