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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구·비구니 차별을 넘어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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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현대 사회는 급속하게 양성 평등사회로 변하고 있다. 남성과 여성의 차별이 현실적으로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교육의 균등과 문화의 개방, 민주사회의 정착 등으로 여성의 지위는 크게 향상됐거나, 되고 있다. 사회 일반의 성평등 확산은 남녀 불평등 구조를 간직한 최후의 성역으로 간주되는, 평등과 사랑을 핵심 교리로 하면서도 성차별을 공인하는 종교계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남성 중심의 성직구조와 신앙문화를 가진 개신교나 천주교도 최근 내부에서 작은 변화가 일고 있다. 원불교는 특히 종교계 성평등을 리드하고 있다. 태동 당시부터 성평등으로 출발했을 뿐 아니라, 최고 종무 책임자인 교정원장에 여성 교무를 선임, 실천적 모범까지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다른 종교보다 훨씬 성평등적 종교인 불교 역시 교단 내의 성차별 철폐를 위한 논의가 활발하다. 역사적으로 불교는 다른 종교와 달리 법적.제도적으로 여성의 지위를 보장해 왔다. 기원전 5세기께 여성 수도자 집단(비구니 승가)을 승인하고, 오늘날까지 그것이 유지.전승되고 있다는 사실에서, 불교의 성평등성은 유감없이 드러난다. 제한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비구니가 수행하고 교화하며, 종교의식을 집전하는 데 초기 불교 시절부터 제약이 없었다. 부처님은 계급제도인 카스트를 부정하고, 불평등 구조인 신분제도와 성불평등 타파를 위해 노력했던 지도자였다.

이런 평등성에도 불구하고 불교 안에 조금 더 들어가면 비구.비구니 사이엔 차별이 있다. 법적.제도적으로 여성의 지위가 향상돼도 사회에 차별이 존재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불교계 내의 차별은 크게 교리적 차별과 현실적 차별로 나뉘는데 보다 심각한 것은 교리적 차별이다. 여성의 출가로 부처님 정법의 수명이 5백년 축소됐다는 정법(正法) 오백년 감소설, 여인은 성불할 수 없다는 여인 불성불설(不成佛說), 비록 1백세 된 비구니라도 갓 수계한 비구에게 예배해야 된다는 등의 내용을 담고 있는 팔경법(八敬法) 등이 대표적 예다. 이로 인해 교단에서 비구니 스님은 각종 인사와 의사결정 과정에서 소외되기 일쑤였다.

문제는 이런 교리들이 부처님의 친설(親說)인가 하는 점인데, 학자들 사이에 의견이 갈린다. 부처님 친설이다, 후대에 삽입됐다, 부처님에 의해 일부가 만들어지고 일부는 역사적으로 후대에 첨가됐다는 세 가지 학설이 있다. 개인적으론 셋째 학설에 무게를 두는데, 그렇다 해도 '1백세 된 비구니라도 갓 수계한 비구에게 예배해야 한다'는 조항은 명백한 불평등이라고 생각한다. 출가 연령이나 깨달음의 무게에 의해 확립되는 것이 승가의 위계(位階)이고, '사십이장경'에선 악인보다 선인에게, 선인보다 오계를 지키는 사람에게, 오계를 지키는 사람보다 수다원에, 수다원보다 사다함에, 사다함보다 아나함에, 아나함보다 아라한에, 아라한보다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는 것이 가장 좋은 공양이라고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설득력 없기는 정법 오백년 감소설과 여인 불성불설도 마찬가지다. 인도에서 불교가 쇠퇴한 것은 비구니 때문이 아니란 것은 역사적 사실이며, '장로니게'(비구니의 게송을 모아놓은 초기 불전문학)엔 여성으로 깨달음을 얻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가득하다.

따라서 비구니의 활동을 제약했던 팔경법.정법 오백년 감소설.여인 불성불설 등에 국집(局執)할 필요가 없다. 조계종 총무원 문화부장.문화국장을 비롯해 포교원과 교육원, 각 사찰이나 학술 등 분야에서 소임을 맡고 있는 비구니는 그 능력을 인정받고 있다. 자신과 법(法)과 깨달음에 의지해 피안에 도달해야 될 승단에 존재하는 비구.비구니 차별 문화는 이제 과감하게 버려야 할 것이다.

법 인 해남 대흥사 수련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