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해는뜨고 해는지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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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5면

제1부 불타는 바다 그리고,산 자도 말이 없었다(9)밤길을 걸어내려가는 화순의 입가에 웃음이 감돈다.쓸쓸하게,그 얼굴이 추수 끝난 벌판같음을 누가 알랴.
여자 팔자 뒤웅박,굴러가다가 제자리에 있어 앉으면 한평생 신랑덕 자식덕 보아가면서 부지런히 살면 그렇게 한 평생 익어가는거고,어느 자갈더미 험한데 끼어처박히면 무엇하나 마음 내키는대로 펴보지도 못하고 그렇게 오그라드는 거 아니었 던가요.
명국의 말에 외면하는 화순을 보며 그래도 그는 한량같은 소리를 했었다.
『네가 그래도 보기보다… 눈이 높다.』 『별소리 다 듣고 사네.아직 나 염할 나이 저만큼 먼 사람이라오.』 『나이든 사람앞에서 못하는 소리가 없구나.여차저차 지난 일을 접어두더라도.
그래 맞다.네가 사내녀석 하나는 잘 봤다.길남이를 보다니.네가그래도 남자 보는 눈은 있는 거,내 이제 알았다.』 『남세스럽게 별 소리 다 하고 있네.그런 말가지고 뭐라고 하는지 알아요?』 『뭐라고 하는데?』 『병주고 약준다는 게 바로 그런 거예요.』 세상이 어디 그렇게 좋은 사람만 있었던가.잠시 발걸음을멈추며 화순은 불빛 가득한 일본인들의 숙소를 둘러본다.
혼자 걷는 밤길,이렇게 맑은 정신에 걸어보는 것도 언제적 일이었나 싶다.
한강에 배 지나가기가 아니었다.그 주점에서 부엌일을 하면서 처음으로 몸을 버렸을 때는 어린 나이에 이게 무슨 일인지조차 몰랐었다.무섭다는 거,눈 감고 이 악물며 참아내기만 하면 되는것으로 알았다.어쩌자고 이 남자는 주인 아주머니 만 없으면 자신을 안방으로 불러들이는지조차 몰랐었다.
그러던 어느날,주인남자에게 옷이 벗기어진채 덮쳐서 깔려 있는가게 뒷방으로 주인 여자가 들이닥쳤다.
남자는 바지춤을 올리는지 마는지 방을 뛰쳐나갔고 화순은 주인여자에게 머리채를 휘어잡혀 끌려다녔다.
『네 이년,밤톨만한 것이?』 겉옷 통치마 하나에 속은 벌거벗겨진 채 마루로 마당으로 머리채를 잡힌 채 끌려다니면서,그때 겨우 안 게 있었다.
사람 사이에는 이런 것도 있구나.주인여자는 입가에 게거품을 품으며 악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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