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희덕.정은숙 두 여류시인 나란히 시집출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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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3면

질서정연하고 의미로 충만했던 세계가 어느날 문득 혼란스럽고 텅빈 껍데기처럼 느껴질 때 개인의 삶은 허무에 던져지거나 출구없는 자의식의 감옥에 갇혀 버리기 쉽다.
그러한 삶은 어둡고 불안하고 쓸쓸하다.
나란히 시집 『그 말이 잎을 물들였다』(창작과 비평)와 『비밀을 사랑한 이유』(민음사)를 낸 두 여성시인 나희덕(28)과정은숙(32)은 삶의 그늘을 포착하는 데서부터 그 쓸쓸함을 이겨내는 방식까지 뚜렷하게 대비되는 개성을 보여주 고 있어 흥미롭다. 나희덕의 시는 멀리서 바라보는 삶의 원경이다.그에게 삶은 잡힐듯 잡힐듯 잡히지 않는,점점 멀어져서 결국은 소실점이 되고 마는「스쳐 지나감」의 과정이다.그 기다림의 공간에 뿌리내린 존재들은 작게 보일 수밖에 없다.나희덕은 이 작은 것들을 따뜻한 연민의 시선으로 감싸안는다.
『…떨어지기 위해 시들기 위해/아슬하게 저를 매달고 있는 것들은/그 무게의 눈물겨움으로 하여/저리도 눈부신가요.』(「찬비내리고」) 『어디서 나왔을까 깊은 산길/갓 태어난 듯한 다람쥐새끼/물끄러미 나를 바라보고 있다/그 맑은 눈빛 앞에서/나는 아무것도 고집할 수가 없다/세상의 모든 어린 것들은/내 앞에 눈부신 꼬리를 쳐들고/나를 어미라 부른다/괜히 가슴이 저 릿저릿한 게/핑그르르 굳었던 젖이 돈다…』(「어린 것」) 「작아지고 사라짐」에 대한 인식은 생에 대한 비애를 안겨다 주지만 나희덕은 그것을 사랑으로 끌어올린다.
작은 것에 대한 사랑을 가능케 하는 모성,그것은 삶의 쓸쓸함을 받아들이고 욕망을 버림으로 해서 얻어지는 「자기비움」과 수용의 자세이기도 하다.
정은숙은 나희덕과는 반대로 세상을 현미경으로 들여다본다.그에게 눈에 보이는 세계는 껍데기며 삶의 의미는 그 배후에 숨어 있는 듯이 보인다.
그래서 현실에 가깝게 갈수록 사라지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보다는 확대돼서 다가오는 거대한 껍데기에 대한 두려움이 앞선다.
여기서 시인은 껍데기 속에서 살아가는 사회적 자아와 실현되지않은 욕망의 총체로서의 내면적 자아로 분열된다.
그리고 일상의 틀 속에서 「해야 하는 것」을 하고 살아가는 사회적 자아보다 「하고 싶은 것」을 꿈꾸는 내면적 자아를 자신의 본래 모습이라고 생각한다.정은숙은 『나를 배반하고 모독하는것이 삶이다』고 말한다.
『…/나는 사람,나는 보이지 않는 사람/벽 가까이서 멍이 들라고/사지를 흔들며 벽에 부딪치곤 하지/붉은 피가 터져 나오지못하고/멍이 되어 살 밑을 번져갈 때 /비로소 나는 모독을 받아들이고/모독은 번져 가네/.』(「모독1」) 정은숙의 시에서 세계와 자아,보이는 나와 보이지 않는 나의 일치는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내면적 자아를 둘러싼 껍데기와의 피멍드는 치열한 소모전 끝에 그는 비로소 통합되지 않는 분열의 상황,모독을 자신의 삶의 조건으로 받아들인다.「번져가는 모독」을 견디는 그의힘은 모성의 피안에 있는 견고한 부성적 자존심이다.
나희덕과 정은숙의 시에는 개인과 전체,역사와 도덕,사실과 당위 등 여러 국면에서 분열을 겪고 있는 현대의 모습이 투영돼 있다. 두 시인은 독특한 개성으로 분열과 허무에 대항하는 두가지 방식을 보여주고 있다.
〈南再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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