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에서] ‘결국 국내파 뽑을 거면서’… 어설픈 축구협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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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국 하룻밤 새 국내 감독으로 갈 것을 외국 명장 이름을 들먹이며 4개월씩이나 끌었나.”

허정무 감독이 국가대표 축구팀 새 사령탑에 임명됐다는 소식을 접한 축구팬들은 대한축구협회의 무능과 졸속을 한목소리로 비난하고 있다.

정몽준 축구협회장은 5일 “(울리에와 매카시 중 한 명이) 2~3일 내로 최종 결정될 것이다. 유럽의 명장을 모시게 돼 기쁘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제라르 울리에(60·프랑스) 또는 마이클 매카시(48·아일랜드)의 영입이 사실상 확정된 것 같은 분위기였다.

 그러나 6일 오전 매카시가 한국에 가지 않겠다는 뜻을 밝힌 데 이어, 울리에마저 가족의 반대로 한국행을 포기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축구협회는 부랴부랴 기술위원들을 소집해 긴급 회의를 했고, 이날 밤 늦게 허 감독을 낙점했다. 국제축구연맹(FIFA) 부회장인 정 회장이 자국 대표팀 감독 선임 과정도 제대로 몰랐다는 ‘코미디’가 연출되고 만 것이다. 좋은 감독을 데려오게 돼 ‘기쁘다’고까지 한 정 회장으로선 이보다 더한 망신이 없을 것이다.

협회는 ‘2004년 메추 파동’에 이어 또다시 협상력 부재와 보안 유지 실패로 일을 망쳤다. 협회는 2004년 코엘류 감독의 후임을 정하는 과정에서 ‘브뤼노 메추(프랑스)가 영입 1순위’라는 사실을 공개했다. 이 바람에 메추의 몸값이 뛰었고, 메추를 놓친 협회는 대타로 조 본프레레를 데려올 수밖에 없었다.

이번에도 울리에와 매카시는 축구협회의 어설픈 처신으로 자신들이 유력 후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대한축구협회가 영입에 몸이 달수록 이들은 여유와 배짱을 부렸다. 우리 카드를 다 보여 주고 게임하는 식이었다.

‘게도 구럭도 놓친’ 협회는 허 감독을 찾았다. 전남은 올해 FA(축구협회)컵 우승으로 내년 아시아챔피언스리그를 준비해야 한다. 허 감독은 계약이 내년 말까지다. 그런데도 다급한 협회는 전남구단에 애걸복걸해 허 감독을 빼 왔다. 해외 출장 중인 이구택 포스코 회장에게까지 전화를 해 ‘선처’를 부탁했다고 한다. 부산 아이파크에 부임한 지 보름밖에 안 된 박성화 감독을 올림픽대표팀 사령탑으로 차출한 것과 똑같은 모양새였다.

협회는 한국 축구가 처한 현실과 미래의 비전을 먼저 생각하고 감독을 선임하는 ‘큰 그림’을 그릴 생각은 아예 못하고 있다. 그저 여론과 상황에 쫓겨 되는 대로 감독을 뽑아 오고, 성적이 나쁘면 자르는 악순환을 계속해 왔다. 이번만은 지위 고하를 떠나 확실하게 책임을 물어야 한다.

정영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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