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인들 영화 '색계' 보러 해외로 나가는 이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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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중국 베이징(北京)의 멀티플렉스 극장에서 화제의 영화 '색계(色戒·사진)'를 봤다. 서울에 사는 지인들이 이 영화를 보고 '강추'하는 바람에 "얼마나 노골적으로 잘 만들었기에" 하는 호기심이 발동했다. 일부 국내 언론 매체가 이 영화 관련 기사를 보도하면서 30-40대 국내 여성 관객들의 외마디 감탄사( "어머머,어쩜 저렇게")를 제목으로 뽑았던 선정적 기사도 기억났다.

영화를 본 이유는 하나 더 있었다. 중국 정법대학 박사 과정에 재학중인 남자 대학생이 이 영화를 보고 영화를 싹뚝싹뚝 가위질한 검열 당국(광전총국)과 영화관을 상대로 소송을 냈다는 기사를 쓴 당사자로서 중국 정부의 검열 솜씨를 확인하고 싶은 의도도 있었다. 그 대학생은 "관객의 알권리와 공정교역권(외국에 사는 동년배 대학생과 대등하게 예술 작품을 감상할 권리)을 침해당했다"며 입장료(50위안,약 6000원)의 10배를 배상하라고 요구했다.
이 영화를 보게 된 동기는 이처럼 다소 '불온'했다. 그러나 하도 많이 가위질해 2시간이 채 안 되는 '색계'를 보고 나오면서 필자는 솔직히 참담했다. 서울의 지인들이 흘려준 핵심 장면은 거의 볼 수조차 없었을 뿐더러 영화의 주제도 실제와 너무 동떨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서울의 지인들의 평가는 다채로웠다."영화 '색계'가 인간의 내면을 잘 묘사해낸 수작이다" "정사 장면이 노골적인 것은 사실이지만 주제 의식과 잘 결합돼 있다" "결코 저급한 포르노와는 차원이 다르다" "한동안 '색계'로부터 받은 충격적 감동으로부터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등등.

하지만 난도질당한 '색계'는 전혀 다른 영화로 둔갑해 있었다. 중국 검열 당국이 이 영화를 가위질 하면서 재창조 해낸 메시지는 다음과 같았다. 사회주의 혁명과 항일 운동을 하기 위해 일본 괴뢰 정부의 주구 이선생(량차오웨이 분)을 암살하는 사명을 받은 여성 혁명 전사 왕자즈(탕웨이 분)가 기혼 남자의 육체적 매력에 빠져, 그리고 다이아몬드에 눈이 멀어 총살을 당했다.

말하자면 색(욕망에 눈이 멀어)과 계(총살을 당하다)의 주제 의식을 이보다 더 극명하게 표현해낼 수 있을까. 아름다운 사랑이야기를 교훈적 영화로 변질시켜버렸으니 영화의 감동이 살아날 리 만무했다.

아무리 행간을 읽으려해도 이런 '주문된(tailored)' 주제 의식을 크게 벗어나기는 어려웠다.

허허로운 마음이 들었던 것은 량차오웨이와 탕웨이의 정사 신이 두 번 밖에 나오지 않았고 그것도 턱없이 짧은 3분 남짓이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날 밤 집으로 돌아가 중국 인터넷을 뒤졌다. 영화 장면을 4-5개 파일로 쪼개 올려놓은 불법 사이트가 몇 개 검색됐다. '삭제된 베드신 전격 공개'라는 사이트에 들어가 봤지만 조잡한 장면들 뿐이었다. 일부 사이트는 잘못 열면 컴퓨터가 바이러스에 감염될 수 있다는 엄포 때문에 들여다볼 엄두도 나지 않았다.

다음날 한 DVD 점에서 구입한 불법 수입된 '색계'도 처참하게 가위질 되기는 마찬가지였다. 당국의 입맛에 맞게 가위질 한 DVD는 불법 복제본이라도 단속을 눈감아 주는 것인지, 아예 불법 DVD에 대한 단속의 손길이 미치지도 않는 지는 알 길이 없다.

지금으로선 12월 말쯤에 무삭제본이 들어온다는 '반가운' 소식에 실낱같은 기대를 할 수 밖에 없다.

본의 아니게 '색계'를 세번이나 봤지만 이안 감독이 전하려고 했던 영화 '색계'의 주제 의식을 어디에서도 발견할 수 없었다.

이쯤 되자 "너무 유별나다"고 속으로 비웃었던 그 사람들의 심정을 다분히 이해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광둥성을 비롯한 경제가 발전한 중국 남부 도시의 중산층들 말이다.그들은 온전한 '색계'를 보기 위해 비싼 돈을 주고 홍콩으로 여행을 다녀오고 있다고 한다. 색계는 다음과 같은 적나라한 사실을 웅변해준다. 중국에서 제대로 된 영화를 보기 위해선 용기와 돈이 필요하다고.

베이징=장세정 특파원 zha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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