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우디판 MIT' 국왕 9조원 기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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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연자원.금융자본을 놓고 격돌했던 세계 각국이 요즘은 인재 확보를 위해 총성 없는 전쟁을 벌이고 있다고 미국 경제 전문지 포춘이 4일(현지시간) 보도했다. 앞으론 우수 인재를 누가 더 많이 끌어 오느냐에 국가의 부와 힘이 좌우될 것이라는 판단 때문이다. 이 잡지는 최근 수년간 기업들이 최상의 인적 자본을 유인하기 위해 경쟁을 벌여 온 반면 지금은 국가 차원의 인재 확보전이 치열하다고 전했다.

오일머니로 부를 축적한 사우디아라비아가 대표적이다. 압둘라(사진) 사우디 국왕은 국가의 미래가 석유가 아닌 인재에 달려 있다고 보고 125억 달러(약 11조5000억원)를 투자, '사우디판 매사추세츠공과대(MIT)' 건립을 추진하고 있다. 2009년 9월 개교를 목표로 준비 작업이 한창인 '킹 압둘라 과학기술대(KAUST)'다.

압둘라 국왕은 이 학교에 초일류 교수진과 연구 인력, 학생들을 영입하기 위해 100억 달러(약 9조2000억원)의 기부금을 내놓았다. 이는 미국 MIT가 142년간 끌어 모은 기부금 총액과 맞먹는 액수다.

외국인 노동자들에 대해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았던 유럽연합(EU)도 숙련된 기술자를 확보하기 위해 유화적인 제스처를 보이기 시작했다. 고학력의 숙련 기술자가 유럽 내 기업으로부터 취업 제안을 받는 경우 2년마다 갱신이 가능한 거주 허가권을 주겠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개발도상국 출신의 숙련 기술자 중 유럽으로 유입되는 비율은 불과 5%에 그쳤다.

이에 따라 미국 내에서도 보호주의적 인재 관련 정책을 개혁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미국은 산업화 시대에 관세와 수출입 쿼터로 제조업계의 일자리를 보호했던 것처럼, 정보화 시대엔 이민을 제한함으로써 지식 노동자를 보호하려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같은 보호주의를 지속했다간 세계 각국 간 경쟁에서 도태될 수밖에 없다고 이 잡지는 꼬집었다. 세계적인 인터넷 네트워크 장비업체 시스코의 최고경영자(CEO) 존 체임버스는 "대학 졸업자라면 누구나 문호를 열고 받아들여야 한다"고까지 주장했다.

포춘은 "전 세계 부국들의 교육 시스템이 반드시 우수하지 않기 때문에 자체적인 인재 충원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며 "이에 따라 국가 간 고급 인력 확보 경쟁은 갈수록 격화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실제로 세계 각국에 정보기술 분야 인력을 공급해 온 인도의 경우 최근 들어 변화 추세가 뚜렷하다. 해외 근무를 삶의 목표로 삼았던 인도의 젊은이들이 자국 근무를 더 선호하게 된 것이다. 이 잡지는 "새로운 전쟁의 승자가 누가 될지는 아직 불분명하다"며 "현명한 국가라면 대비를 서둘러야 할 것"이라고 촉구했다.

신예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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