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오동 천년, 탄금 50년 29.현제명의 제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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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필자는 대학 졸업 직전 학교 축제가 열린 서울 동숭동 마로니에광장에서 가야금을 연주했다.

서울대 법과대학 졸업반 마지막 학기가 끝날 무렵이었다. 1958년 법대가 있던 서울 동숭동의 늦가을 오후는 평온하고 한가로웠다. 어느날 음대의 사환 아이가 나를 찾아 다닌다는 말이 법대 사무실에서 들려왔다. 그 사환이 전해주는 쪽지를 받았는데 ‘음악대학 학장이 황병기를 만나고 싶어 하니 학장실로 와주길 바란다’는 내용이었다.

법대에서 10분 정도 걸어 음대에 갔다. 서울대 초대 음대 학장인 현제명(1902~60) 선생이 서울대 의대 캠퍼스 안에 있는 목조건물 2층 음대 학장실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성악가이자 작곡가인 그에게서 받은 첫 인상은 마치 레슬링 선수 같다는 것이었다. 58세에 갑자기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정정했다. 덩치가 크고 얼굴은 붉었으며 남자다웠다.

“음악대학에 내년부터 국악과를 설치하려고 해. 그러니 자네가 강사로 나와 가야금을 좀 지도해줬으면 좋겠네.” 현 선생의 말은 느닷없었다. 그때까지 한 번도 생각해 본 일이 없는 제안이었다. 나는 깜짝 놀랐다. 57년 내가 KBS 주최 콩쿠르에서 1등한 소식을 들었던 모양이다.

“며칠만 주십시오. 생각해 보겠습니다.” 실제로 며칠 뒤 학장실을 다시 찾았다. 그리고 거절했다. “저는 나름대로 계획한 길이 있습니다. 음악은 좋아서 하는 것이고 제 전공이 아닙니다.”

현 선생은 어린 학생의 주장에 물러설 분이 아니었다. “지금 법학을 전공하는 사람은 삼태기로 담아낼 정도로 많아. 법을 해서 뭐 하려고 하나.” 그는 말을 이어갔다. “자네가 지금 가야금을 한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하고 보배로운 건 줄 아나.” 그의 말에는 힘이 실려 있었다.

현 선생은 이어 결정적인 제안을 했다. “자네가 정 그렇다면 일주일에 딱 하루, 단 한 시간만 내주게. 그렇게만 해도 나는 영광으로 알겠네.” 일주일에 한 시간이라고 하는 데에는 더 이상 거절할 방도가 없었다. 게다가 영광으로 알겠다는 데에는 감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속으로 결심했다. ‘꼭 4년 동안 만 강사로 일해야겠다’. 4년을 해야 한 학생의 입학과 졸업을 모두 볼 수 있겠다는 계산 때문이었다. 이렇게 해서 59년부터 서울대 음대에서 강사를 시작하게 됐다.

현 선생은 남산에 피아노를 갖다 놓고 음악학교를 세운 뒤 서울대로 그 학교를 그대로 가지고 들어온 사람이다. 서울대 음대 설립자나 다름없고 학생들을 아들딸처럼 생각했다. 그런데 60년 4·19 이후 학생들이 “음대를 민주적으로 운영하라”며 그를 비난하는 데모를 하자 충격을 받아 쓰러졌고, 일주일 뒤 별세했다. 나를 처음 서울대로 이끌었던 현 선생의 타계는 꽤 큰 충격이었다. 나는 63년 개학을 얼마 앞두고 당시 김성태 학장과 이혜구 국악과 과장의 집에 찾아가 “강사를 그만두겠다”고 간청했다. 두 분 다 극구 만류했지만 ‘꼭 4년 동안만 강사로 일해야겠다.’는 초심대로 끝내 그만두었다.

황병기<가야금 명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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