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오동 천년, 탄금 50년 26. 심상건의 산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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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건 선생이 1926년 발표한 가야금 병창 음반. [사진=김문성씨 제공]

심상건(1889~1965) 선생은 가수 심수봉의 아버지와 사촌 간이다. 국악인들은 “심수봉이 물려받은 음악적 소양이 보통이 넘는다”라는 말을 종종 한다. 심 선생은 최초의 문화재 위원을 역임한 예용해가 1960년 대에 펴낸 『인간문화재』라는 책에서 가야금 분야의 1인자로 꼽았을 정도로 산조 분야에서 인정받는 음악가였다. 소설가 김동리가 가장 좋아하는 산조로 심 선생의 산조를 꼽았다고도 전해진다.

심 선생은 일제시대부터 아주 유명했지만 남도악(南道樂)의 본고장인 호남 지방에서는 별로 쳐주지 않는 사람도 많았다. 이 분의 고향은 충청도여서 순수한 남도악에서 벗어나 경기조(京畿調)의 선들선들한 맛이 섞여 있어서 남도악인보다는 서울 사람들, 특히 국립국악원의 악사들이 좋아했다. 뿐만 아니라 심 선생은 고정된 가락이 없이 연주할 때마다 즉흥적으로 탔기 때문에 남도악을 하는 사람들은 “조백이 없다”는 말로 깎아 내렸다. 그때 그때의 흥취는 있을지언정 가락의 짜임새 즉 구성감이 없어 산만하다는 것이다. 심 선생은 음악성이 아주 좋아서 연주에 어떤 계획이 필요 없었던 것일 수도 있다.

“나는 특별히 배운 산조 스승 없이 처음부터 내가 만들어서 탔다”고 말했던 심 선생은 실제로 자신의 감정에 충실해 듣는 사람을 탄복시키는 묘한 음악을 만들어냈다. 특히 남도 음악에서는 가야금을 연주할 때 앞에서 나온 소리를 모두 막아서 한 순간에 하나의 음만 나도록 하는 게 기본이다. 이래야 선율의 선이 깨끗하게 살아난다. 하지만 심 선생은 자신의 음악성으로 앞소리와 뒷소리를 섞어서 신기한 화음을 만들어냈다. 전통적으로 보면 지저분한 소리지만 이를 듣기 좋게 조화시켜 듣는 사람들을 황홀경으로 이끄는 탁월한 음악성을 발휘했다.

내가 처음 산조를 배우고 싶다고 생각하게 한 것이 그의 산조였다. 동시에 그는 내 가야금 인생 전반에 영감을 준 사람이다. 특히 1990년대에 내가 황병기류 산조를 만들 때 그의 영향이 컸다. 내 산조 중 진양조에는 ‘변청’이라는 것이 있는데 이것은 보통 산조와는 다른 높이의 음 즉 청을 사용하는 심 선생의 산조에서 따온 것이다. 그는 보통 산조와는 달리 낮은 음역에서 진양조를 시작해 좀처럼 음을 높이지 않았다. 낮은 음역에서만 한참을 맴돌다가 힘들게 한 음씩 높여갔다. 그러면서 그는 “음 하나 높이는 게 얼마나 힘든 줄 아냐. 간단히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이 아니다”라는 가르침을 줬다. 그에게 배우던 한 여학생은 “비 오는 날 선생님의 낮은 음만 듣고 있으려니 미치겠다”며 가야금을 그만뒀다는 일화도 전해줬다.

이렇게 상당히 이색적인 산조를 만들어 탔던 심 선생의 음악은 가락이 웅성 깊고 호방했지만, 논란이 많았다. 그는 하나의 줄을 눌러 여러 소리를 내는 것을 좋아했는데 어떤 사람들은 “깊이가 있다”고 했고 일부는 “음흉한 소리”라고 헐뜯었다. 내가 산조 가야금을 주로 배웠던 김윤덕 선생 또한 심 선생을 그렇게까지 좋아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김죽파 선생은 “존경할 만한 음악”이라고 높이 평가했으며 한때 심 선생에게 배우러 다닌 일도 있다.

황병기<가야금 명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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