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얽히고 설킨 거짓, 의미 잃은 진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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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이명행(47)씨의 새 장편소설 '사이보그 나이트클럽'은 흥미진진하다.

소설의 두 주인공은 SB라는 정보기관에 근무하는 베테랑 정보분석관 성호경과 S신문 사회부의 민완 여기자 민지수다. 성호경이 작성한, 청와대 실세가 연관된 무기 구매 로비 사건에 관한 보고서가 유출돼 야당 의원을 통해 공개되고 유출의 장본인으로 지목된 성호경의 직속 상관이 경질되는 과정을 통해 소설은 권력의 심층부에서 진행될 법한 음모와 술수, 암투를 실감나게 전한다.

성호경은 자신이 실수해 보고서가 유출된 것으로 잘못 알고 필사적으로 자구책을 마련하는 것으로, 민지수는 정보기관의 허술한 보안체계를 물고 늘어져 기사화하는 것으로 '보고서 사건'에 적극적으로 개입해 당사자가 되는 듯 하지만 치밀하게 사전 계산된 각본에 의해 놀아난 꼭두각시였을 뿐이다. 한편 성호경과 민지수는 밤이 되면 낮과는 1백80도 다른 얼굴로 사이버 공간을 돌아다닌다. 익명 속에 숨어 거침없이 성적 욕망을 발산할 수 있다는 점에서 부킹이 가능한 사이버 나이트클럽은 하나의 해방구이고, 단골 출입자인 성호경과 민지수는 맹목적 욕망 충족 만이 존재의 이유인 사이보그가 된다.

사이버 공간에서 성호경은 철저히 이중적이다. '동고'라는 아이디를 사용하는 토론방에서는 함량 미달로 보고서로 채택되지 못한 문건들을 흘리며 명석함을 과시하지만 '댄싱 울프'라는 아이디를 사용하는 나이트 클럽에서는 적나라한 욕망의 화신이다. 민지수도 처음에는 욕망에 몸을 내던지지만 컴퓨터 IP 주소 추적을 통해 성호경의 이중성을 알게 된 후 성호경을 현실로 끄집어내 까발릴 계획을 세운다.

그런데 성호경이 철저하게 신봉하는 사이버 해방구의 국시(國是)는 인터넷에서 벌어진 일은 어떤 일이 있어도 그 안에서 해결지어야지 현실세계로 가져와선 안 된다는 것이다. 국시를 어기는 민지수의 행동은 처단돼야 한다. 상대방이 자신의 목숨을 노리는데 민지수라고 팔장끼고 있을 수는 없는 일이다.

사이버 섹스 파트너였다가 서로의 목숨을 노리는 사이가 된 두사람. 소설은 마지막 순간까지 예상을 뒤엎는다. 성호경의 진술을 통해서는 민지수가 죽은 것으로, 민지수의 진술을 통해서는 성호경이 죽은 것으로 처리한다. 누구의 말이 맞는 것일까. 작가 이씨는 자신의 작품이 "거짓말에 관한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고 보니 성호경의 보고서 작성 작업과 민지수의 기사 작성 작업은 개연성 충족을 통해 그럴듯한 이야기를 꾸며내는 작업이라는 점에서 엇비슷하다. 때때로 이야기의 진실 여부는 우선 순위에서 밀린다. 암투가 난무하는 현실의 권력체계와 인간성을 앗아가는 사이버 공간은 개인의 노력을 무력화시킨다는 점에서 매트릭스를 연상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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